다국적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AZ)와 영국 옥스퍼드대가 공동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을 둘러싼 유럽연합(EU)과 영국 간 갈등이 2라운드에 돌입했다. 이번에는 AZ 백신 공급 물량을 둘러싼 다툼이다. 양측의 갈등이 백신의 안전성보다는 ‘백신 쟁탈전’이라는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17일(현지시간) 기자회견을 통해 “EU는 우리보다 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이 높은 국가들로의 백신 수출이 과연 균형 잡혀 있는지 숙고할 것”이라며 “그들에 대한 백신 수출을 제한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는 여전히 영국에서 코로나19 백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6주간 EU 역내 공장에서 생산돼 EU 외부로 수출된 코로나19 백신 중 1000만회분은 영국으로 갔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영국에서 생산해 유럽으로 공급돼야 할 AZ 백신의 물량은 그에 비해 부족하다는 취지였다. 영국 가디언은 “EU가 백신의 ‘공평한 분배’가 담보되지 않을 경우 영국으로의 백신 수출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고 전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우리는 세기의 위기 속에 있다”면서 “유럽은 백신 수출에 있어 호혜성과 비례성을 보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어 “현재로서는 어떠한 선택지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며 EU 조약 122조에 따라 긴급 권한을 발동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EU 조약 122조에 따르면 EU는 회원국들이 특정 제품을 공급받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 해당 제품의 생산을 EU 단위에서 통제하고 지적재산권을 정지하는 등의 예외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번 사례의 경우 영국으로의 코로나19 백신 수출을 EU 전체 차원에서 제한하겠다는 의미다. EU가 이 조항을 발동한 것은 1970년 석유위기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으로 전해졌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이것은 유럽이 보다 공정한 몫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영국은 EU가 비민주적 국가들이나 쓰는 ‘벼랑 끝 전술’을 쓰고 있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도미닉 라브 영국 외무장관은 이날 “솔직히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현실이 놀랍다”며 “법적으로 이미 계약된 백신 공급을 방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EU는 (수출 제한 경고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앞서 독일이 혈전 발생 등 안전성을 이유로 AZ 백신 접종 중단을 결정한 뒤 현재까지 EU 회원국 13개국이 뒤따라 해당 백신의 접종을 중단했다. 안전성에 큰 문제가 없다는 현지 보건당국들의 입장과는 차이가 있어 과학적 근거가 아닌 정치적 고려에 따른 조치가 아니냐는 의심이 계속돼왔다. EU을 탈퇴한 영국과 EU가 백신 물량을 두고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EU는 올해 초 AZ가 1~2분기 EU 회원국들에 대한 백신 공급 물량이 기존 계약 물량 대비 50%에 그칠 것이라고 발표하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해왔다. 지난 1월에도 ‘선계약 선공급’이라는 일방적 계약 지침에 따라 AZ가 영국에만 백신을 우선 공급하고 있다며 EU 역내에서 생산된 백신의 영국 수출을 차단하겠다고 경고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AZ 백신 접종 중단 결정이) 과학적 고려 사항만큼이나 정치적 고려 사항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