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없어 기괴하기까지 한 교외 주차장. 시멘트 블록을 비집고 올라온 풀의 기세가 무섭다. 점점 자연을 침범해오던 인간이 그 자연에 보복을 당한 듯 코로나 사태로 칩거하는 시대가 열렸으니 제 세상을 만난 게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현실. 작가는 그런 대한민국 풍경에 중년의 남자를 집어넣어 더 비현실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같은 남자가 서로의 도플갱어처럼 한 화면에 서 있기도 하고 누워 있어서다. 서 있는 남자는 살아남으려는 의지를, 누워 있는 남자는 포기하고픈 마음을 은유한다. 그렇게 코로나 시대, 50대의 초상을 오버랩했다.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서울 은평구 진관 1로 사비나미술관에서 중견 작가인 성신여대 유근택(56) 교수 개인전 ‘시간의 피부’(5월 23일까지)가 열리고 있다. 2017년 현대갤러리 전시 이후 4년 만의 개인전이다. 그때는 한여름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 모기장 안에서의 낮잠 등 유쾌하거나 위로를 주는 일상을 그렸다면 이번에는 코로나 사태, 남북 정상회담 등 사회 이슈로 관심사를 확장했다.
작가에게 코로나 사태는 각별하다. 지난해 봄 프랑스의 한 레지던시에 머물던 작가는 갑자기 유럽에서 코로나가 대유행하면서 탈출하다시피 돌아왔다. 귀국 이후 한국 역시 신천지 사태를 고비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됐다. 갇혀 지내던 어느 날, 답답함을 달래려고 인천을 드라이브하다 차를 세웠다. 유원지 인근, 차 한 대 없는 텅 빈 주차장의 풍경이 너무 강렬해 이번 전시의 ‘생. 장’ 연작으로 탄생했다.
놀라운 것은 자연의 기세와 인간의 우울이라는 상반된 특성을 동시에 담아내는 특유의 마티에르와 붓질의 힘이다. 그가 창안한 동양화의 현대적 변용이 가지는 힘이다. 작가는 동양화의 양대 재료인 종이와 수묵 가운데 수묵은 버렸다. 그러면서도 전통 채색화 안료인 호분(흰색을 내는 조개껍데기 가루)은 가져왔다. 이를 서양화 물감인 구아슈(불투명 수채화 물감)와 섞어 색을 낸다. 덕분에 화면에는 번질거리는 유화 물감의 기름기와는 다른, 담백하면서도 스미는 맛이 난다. 그만의 기법은 또 있다. 두 장을 이어 붙여 바탕 종이를 한껏 두껍게 만든 작가는 그 종이에 드로잉 한 물감 층을 물에 적신 철로 된 솔로 박박 긁어낸다. 그러면 종이의 섬유질이 말갈기처럼 일어난다. 물감이 스미어 수동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이미지들이 솔질 덕분에 아연 격해지는 효과를 낸다. 박박 긁어 일으켜 세운 종이의 결은 잡풀의 기세를 표현하는 데 좋고, 솔질로 인해 종이 섬유질과 엉기어 버린 물감 층은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기에 좋다. 그가 그린 그림들이 그냥 풍경이 아니라 심리적 풍경, 시대적 풍경으로 읽히는 이유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수묵은 종이에 스며들어가 멈춘다. 그렇게 함으로써 종이 내부에 어떤 공간을 형성해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담아낸다. 일종의 영화적인 공간을 함축하고 있다”면서 “호분과 섞은 구아슈 물감도 그렇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제가 계승하고자 하는 건 동양화의 이런 공간 미학”이라고 강조했다.
철 솔질 기법은 심리를 담아내기에 적절하다. 주차장에 시대의 우울을 담아내듯 자신의 모습을 기호처럼 그려 넣은 것은 그런 이유로 보인다. 탁자 끝 떨어질락 말락 한 지점에 자화상 같은 남자를 세워 놓기도 한다. ‘끝에 서 있는’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연작은 작가가 즐겨 쓰는 파스텔톤 대신에 흑백을 쓴다. 검은색 물감 덩어리가 철 솔질에 의해 형태가 부서지면 작가는 다시 흰색 물감으로 윤곽을 그려 형태가 꿈틀꿈틀 살려낸다. 표현주의 화가들의 붓질을 상기시키지만 종이와 호분의 만남 덕분에 서양화와는 다른 시적인 느낌이 있다.
작가의 시적 상상력이 빛을 발하기도 한다. 아침 식탁의 나무 무늬를 보고 물결을 상상했던 작가. 그는 하루의 강물 위로 작은 배를 타고 노 저어 떠나는 자신을 식탁 이미지 위에 그려 넣었다. 코끼리와 원숭이와 함께. 작가는 되물었다. “우리의 삶이 서커스 같은 여행이 아닌가요?”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