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아버진 죽고 없지만”…4·3수형인 335명 ‘무죄’

입력 2021-03-16 18:10
16일 제주지법은 4·3당시 불법 재판을 받고 유죄를 선고받은 4·3수형인 335명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사진은 행불수형인 유가족이 재판 결과를 듣고 눈물을 보이고 있다.

“4·3당시 피고인들의 범죄 사실을 증명할 증거가 없어 다음과 같이 선고합니다. 각 무죄.”

제주4·3사건 당시 내란죄와 국방경비법 등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 받고 억울하게 수감생활을 한 수형인들이 법원으로부터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람의 한 평생과 맞먹는 기간이 훌쩍 지나 가까스로 범죄자의 낙인에서 벗어났지만 이날 무죄를 선고받은 335명 중 생존 수형인 2명을 제외한 333명은 이미 오래전 행방불명됐다.이날 피고인들을 대신해 눈물을 흘린 것은 그들의 형제자매와 자손들이었다. 행방불명 수형인의 상당수는 수감생활 도중 6·25전쟁이 터지자 군경에 끌려가 총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16일 제주지법 형사2부(부장판사 장찬수)는 재심개시결정이 확정된 제주4·3 사건 당시 수형인 335명에 대한 선고 공판을 열어 피고인 전원에 대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념 대립 속에 희생된 피고인과 그 유족이 이제라도 굴레를 벗고 평안을 찾기를 바란다”며 이같이 선고했다. 앞서 검찰은 피고인들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가 남아있지 않다며 무죄를 구형했다.

이날 재판부로부터 무죄를 선고받은 피고인은 모두 335명이다. 333명은 4·3 사건 당시 군사재판에서 내란죄 등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형생활을 하던 중 거취가 묘연해진 행방불명인들이다. 지난해 2월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했다. 또 다른 피고인 2명은 4·3 당시 일반재판을 통해 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생존 수형인이다. 모두 아흔을 넘겼다. 제주지법은 두 재심사건을 병합해 이날 최종 선고공판을 진행했다.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하면서 “국가가 완전한 정체성을 갖추지 못했을 때 피고인들은 목숨을 빼앗기고 자녀들은 연좌제에 갇혔다”며 “오늘 선고로 그들에게 덧씌워진 굴레가 벗겨지고 나아가 이미 고인이 된 피고인들이 저승에서라도 그리운 사람과 마음 편하게 둘러앉아 정을 나누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날 재판정에는 행불인의 유가족과 생존 수형인이 참석했다. 재판부가 한명한명 피고인의 이름을 부르고 이어 무죄를 선고하자 유가족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예순여덟의 유족 박용현씨는 최종 진술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 큰아버지가 희생 당했다. 아버지는 고아로 72년을 살다가 한을 못 풀고 지난해 돌아가셨다”며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에 깊은 고마움을 표했다.

강방자씨는 “6살때 아버지와 헤어졌다. 내가 79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무죄 판결을 받았다”며 “기쁘고 한편으론 숙연하다”고 눈물을 훔쳤다.

이날 재판은 재심청구 유족들에게 충분한 최종 진술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335명의 피고인을 21개 사건으로 나눠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8시간동안 진행됐다. 재판이 이뤄지는 201호 법정 앞 복도에는 행방불명된 4·3 수형인을 대신해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든 유족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4·3 당시 제주에선 두 차례 군사재판(1948, 1949년)이 열려 2530명이 유죄를 선고 받았다. 이 가운데 384명에 대해 사형이 집행됐고, 나머지 2146명은 당시 제주에 교도소가 없어 전국 형무소로 이감됐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대다수는 수감생활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군경에 끌려가 총살된 뒤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4·3 희생자에 대한 국가 차원의 피해보상과 특별재심을 통한 수형인의 명예회복 등의 내용을 담은 제주4·3 특별법 전부개정안이 지난달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데 이어 이날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개정안은 더불어민주당 오영훈 의원과 국민의힘 이명수 의원이 각각 발의한 법률안을 통합·조정해 마련한 것으로, 대통령 재가 후 공포되면 3개월 뒤인 오는 6월부터 시행된다.

4·3특별법 전부개정안이 시행되면 특별재심 조항을 통해 군사재판에서 형을 선고받은 수형인들에 대한 일괄 명예회복이 가능해진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이날 선고와 같은 유족의 개별 재심청구보다 검찰의 직권재심청구 등으로 남은 피고인들에 대한 재심절차가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더불어 국가 차원의 피해 보상과 추가 진상 조사도 이뤄지면서 제주4·3은 올해 새로운 분기점을 맞고 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