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성 침해했지만 요건 안돼”… ‘형제복지원’ 비상상고 기각

입력 2021-03-11 17:30
형제복지원 피해자와 가족들이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법정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뉴시스

부랑자 수용을 명분으로 감금과 강제노역, 암매장 등을 자행한 박인근(사망) 전 형제복지원 원장의 무죄 판결을 취소해달라며 검찰이 제기한 비상상고가 기각됐다. 대법원은 형제복지원 사건이 헌법 최고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했다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다면서도 검찰총장의 비상상고는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11일 특수감금 혐의로 기소돼 무죄를 확정 받은 박씨의 비상상고심에서 기각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단순히 법령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전제가 되는 사실을 오인함에 따라 법령 위반의 결과를 초래한 것과 같은 경우는 ‘그 사건의 심판이 법령에 위반한 때’라는 비상상고 이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당시 수용소 운영 근거가 된 내무부 훈령 자체가 잘못됐다 하더라도 사안을 판단하기 위한 근거 중 하나일 뿐, 실제 적용된 법령에는 위법 소지가 없어 비상상고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취지다.

다만 대법원은 이 사건의 핵심은 헌법의 최고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됐다는 점이라며 정부의 적절한 조치를 통해 피해자들의 아픔이 치유돼 사회 통합이 실현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대법원 선고 직후 형제복지원 피해자와 가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일부는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국가가 우리를 또 버렸다”며 소리치는 이도 있었다.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자 모임 대표는 “기각된 부분에 대해 피해 당사자로서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한다”면서도 “오늘 이 재판이 피해 당사자의 억울함을 외면한 것은 아니라고 해석한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을 대리한 박준영 변호사는 “대법원이 판결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의 조직적 불법 행위로 인정했고, 이는 소멸시효가 없는 사건이 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며 “이번 판결이 국가배상 청구 소송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비상상고를 제기한 검찰 측은 “대법원의 인용 판결을 기대했으나 비상상고 신청이 기각돼 아쉽다”는 입장을 내놨다.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87년까지 부랑인 수용시설로 운영됐지만 부랑인이 아닌 시민을 불법적으로 감금하고 강제 노역과 구타 성폭행을 일삼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검찰은 원장 박씨를 특수감금 및 업무상 횡령 혐의로 기소했지만 재판에서 공금 횡령 혐의만 인정되면서 박씨는 2년6개월의 징역형을 살았다. 이후 피해자들이 재조사를 요구하고 나섰고,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2018년 11월 대법원에 비상상고를 제기했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