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앞둔 30대 해경이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하다 극단적 선택을 한 가운데 그가 직장에서 겪은 일을 유추할 수 있는 고인의 생전 육성이 처음 공개됐다. 여기에는 고인이 숨지기 전 상관으로부터 받은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9일 국민일보는 고(故) 서보민 경장이 친구 A씨와 나눈 14분42초 분량의 대화 녹취 파일을 단독으로 입수했다. 통화는 서 경장이 숨지기 나흘 전인 지난달 21일 이뤄진 것으로, 차량 블랙박스에 기록돼 있었다. 음성과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극단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서 경장의 당시 고통스러웠던 상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앞서 7년 차 해양경찰관인 서 경장은 지난달 25일 오전 10시쯤 경남 통영시 한 원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달 8일 통영해양경찰서 형사계로 자리를 옮긴 지 18일 만이었다.
서 경장의 고민은 직속 상관의 괴롭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출근해서 뭐하고 왔냐”는 A씨의 물음에 “할 게 뭐 있냐. 내 일이 없는데…”라며 풀이 죽은 채 대화를 시작한다. 서 경장은 “벌써 4㎏이나 (몸무게가) 빠졌다. 서무 옆에 멍청하게 앉아서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사무실에만 가면 축 처지고 가슴도 아프다. 전화가 오면 심장이 떨리고 출근하기 두렵다”고 토로했다.
이어 서 경장은 “OO이 (나를) 없는 사람, 투명인간 취급한다”며 “여태껏 해경 생활하면서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너무 두려워 말라는 친구의 걱정에도 “(OO이) 파워가 좀 세다. (나중에 해양경찰) 서장을 할 사람”이라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그는 휴직을 권유하는 친구에게 “(형사계에서) 버티는 게 무리일까”라며 끝까지 업무에 대한 열망을 보이기도 했다. 서 경장은 과학수사관이 되기 위해 수사경과와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며 준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괴롭힘의 구체적 정황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가 사무실 내에서 일종의 배제와 따돌림을 당했다는 추측은 가능하다.
본지가 함께 입수한 A씨와 또 다른 친구 B씨의 통화 녹취도 블랙박스 영상 내용과 다르지 않다. 이 통화는 서 경장이 숨진 뒤 A씨와 B씨가 나눈 대화다. 서 경장은 세상을 등지기 전 B씨에게도 같은 고민을 털어놨다. B씨는 “(점심시간에) 보민이를 놔두고 계장이 직원이랑만 밥을 먹으러 갔다더라. 사무실에 버젓이 있는데 빼놓고 갔다더라”며 “(보민이가) 계장이 처음부터 자기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 표정 때문에 출근하기 괴롭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B씨는 서 경장의 후임이던 C씨에 대한 얘기도 덧붙였다. 그는 “보민이가 자기보다 후임인 C씨가 맡던 형사계 서무 자리로 갔다. 인수인계한다는 명분으로 옆에 서 있었다고 들었다”며 “C씨가 ‘옆에만 서 있지 말고 쓰레기 좀 치워주시면 안 돼요’라고까지 말해 자존심이 상하고, 자존감이 떨어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
유가족과 친구들은 서 경장이 부서 내 ‘태움’ 문화와 상사의 괴롭힘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 경장과 친구의 대화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서 경장의 친형은 이날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동생이 죽기 일주일 전 병가를 내고 정신과를 찾아 우울증 치료제를 처방받았다. 진료 이력을 떼어보니 전에는 단 한 번도 우울증 치료를 받은 적이 없었다”며 동생이 괴롭힘에 의해 숨진 것이라고 거듭 호소했다.
앞서 서 경장의 여자친구도 지난 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려 “고인이 부서 내에 존재하는 태움 문화로 인해 사망 직전까지 정상적인 업무를 배당받지 못했고, 후배 경찰관의 업무를 뒤에서 지켜만 보며 업무와 관련 없는 허드렛일을 하는 등 심적·정신적 고충을 토로했다”며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청한 바 있다. 서 경장 본인도 부임 나흘 만인 지난달 12일 인터넷 커뮤니티에 관련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에 대해 최혜인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더 살펴봐야겠지만, 생전 진술과 어려움을 호소한 기록이 판단 자료가 될 수 있다”며 “부서를 옮긴 뒤 주위 동료들이 바뀌며 왕따를 당했다는 건데 (상관 같은) 사람이 따돌림을 시키면 다른 동료들도 동조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결과적으로 그 사무실에서는 (서 경장) 혼자밖에 없는 모양새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 노무사는 “업무를 제대로 부여하지 않고 멀뚱멀뚱 앉아 있도록 하는 것도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며 “폭행, 폭언은 가장 흔하지만, 업무에서 배제하거나 따돌리는 것도 많다. 특별히 녹음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자료 만들기가 어려워 상대적으로 덜 드러날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울증이 발병해 약물치료를 했고, 정상적이지 않은 정신 상태로 인해 자살로까지 이어진 거라면 산업재해 신청까지 고려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반면 해경은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한다. 특히 직장 내 괴롭힘의 가해자로 지목된 상사는 상위기관인 남해해양경찰청에 최근 제출한 경위서에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밝힌 상황이다. 통영해경 관계자도 이날 통화에서 “각자 입장이 있으니 누구 말이 맞는지 알 수 없다”며 “통영경찰서 수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남해해경청 측도 “담당 상사에 의한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 증세가 사건 원인과 관련이 있는지 조사해봐야 한다”면서도 “의혹은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남해해경청은 경찰 수사 결과를 지켜본 뒤 자체 감찰에 들어갈 계획이다.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