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유럽연합(EU)이 체결하기로 합의한 포괄적투자협정(CAI)이 유럽의회로 넘어가자마자 거센 반발에 부닥쳤다. 협정 비준 권한이 있는 유럽의회는 협상을 주도한 EU 집행위원회가 중국의 인권, 노동 상황을 무시하고 협정을 체결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선물을 주고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를 모욕했다”고 비난했다.
유럽의회는 24일(현지시간) 개최된 국제무역위원회 회의에서 중국과의 투자협정 체결에 관한 우려를 쏟아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의회 의원들은 EU 집행위가 중국의 노동 조건과 홍콩 탄압에 대한 우려를 대충 얼버무렸다고 지적했다. 또 시기적으로 새로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드는 격’이 됐다고 주장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EU가 중국과 CAI를 체결하기 전 미국과 협의해야 한다며 속도조절을 주문했었다.
라인하르트 뷔티코퍼 독일 의원은 “이 협정은 한마디로 시 주석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이라며 “유럽의 지도자들이 중국 편에 선 것이 특히 개탄스럽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 동료(EU 집행위)는 무역의 관점에서 균형을 재조정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균형을 흔드는 행위라고 본다”고 강조했다.
협상을 주도한 마리아 마르틴 프라트 EU 대표는 지난 7년간 이어져온 협상이 지난해 말 갑자기 서둘러 성사된 것은 아니며, 중국이 국제노동 기준을 준수하겠다고 한 약속을 EU가 수용한 결과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협정 체결 시점을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로 미뤘어야 한다는 지적에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는 “EU가 무역이나 투자 협정을 체결하기 전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큰 규모인지에 관계 없이 무역 상대국에 허가를 요청할 필요는 없다”며 “미국은 중국과 1단계 무역협정을 체결할 때 EU와 협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국과 EU는 지난해 12월 30일 포괄적투자협정 체결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협정이 발효되려면 EU 입법부인 유럽의회의 비준을 받아야 하고, 이어 EU 27개 회원국 수장이 모인 평의회 승인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유럽의회 문턱을 넘기도 전에 비난 여론이 급등하고 있는 것이다. EU 관계자는 “지금 당장 투표가 실시되면 유럽의회는 협정 비준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U 집행위는 홈페이지에 올린 CAI 설명 자료를 통해 “EU 기업들의 중국 시장 접근 여건이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회원국들의 우려를 의식해 “중국이 강제노동과 관련한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C29, C105)을 비준하겠다고 한 약속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독립적 위원회의 감독을 받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ILO 협약 비준은 어디까지나 회원국의 주권적 행위여서 비준 시한을 정하지는 못했다고 덧붙였다.
뷔티코퍼 의원은 “우리는 중국이 강제 노동 금지에 관한 ILO 협약을 비준하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명확한 일정과 로드맵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며 “이것이 양보할 수 없는 레드라인”이라고 말했다. EU 집행위는 3월 첫째주에 CAI에 관한 세부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다.
유럽의회 분위기가 이렇게 싸늘한 건 홍콩,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인권 문제가 계속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EU와 포괄적투자협정 체결에 합의한 지 일주일 만에 홍콩 민주화 운동가 53명을 무더기로 체포했다. 이에 대응해 유럽의회는 홍콩 정부 관리들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유럽의회에선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의 인권 침해 및 강제 노동 의혹에 대해서도 보다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중국은 이런 분위기를 애써 과소평가하는 모습이다.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은 24일 기자회견에서 “양측이 합의 조기 비준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이번 협정은 중국과 EU 경제 발전을 위한 중요 이벤트”라고 말했다.
베이징=권지혜 특파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