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전시 2번 방 왜 인기?…레트로 감성 자극 옛 신문 삽화

입력 2021-02-20 06:00
“이우식은 선영이와 춤을 추다가 막 끝나려는 마지막 스텝을 크게 떼여 제 한 다리와 한 팔에 선영이 몸을 실어 옮기듯이 껴안어 가지고 한편 가에 가서 불현듯 그 얼굴에 뜨끔한 키스를 터뜨려 놓았다.”(한설야 작, 노수현 화, ‘마음의 향촌’, 동아일보, 1939. 8. 8)

18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한파가 몰아치는 날씨였지만,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전에는 관람객이 꽤 많았다. 특히 제2전시실은 눈에 띄는 미술 작품이 없는데도 관람객들이 오래 머물러 삽화가 실린 신문 소설을 뒤적이고 있었다.
제2전시실 관람 전경.

“2번 방이 의외로 인기라 놀랐어요.”
최독견 작, 안석주 화 '향원염사' 조선일보 1929년 2월 12일자.

전시를 기획한 김인혜 학예관은 “일종의 모험을 했는데, 그게 통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2번방으로 불리는 2전시실로, 1920∼40년대 인쇄 미술의 성과에 이례적으로 모든 성과를 할애해 삽화가 실인 신문 소설 400여개를 빼곡하게 진열한 것이다. 소주제 제목도 종이 지(紙)를 써서 ‘지상(紙上)의 미술관’이다.
매일신보, 1936년 3월 28일자 신문 소설 '금삼의 피'.

김 학예관은 “유화 작품이 없어서 누가 볼까 걱정했는데, 항상 전시장이 사람들로 차 있다. 특히 신문을 읽는 세대가 아닌 20대들도 즐겨 찾아와 SNS에 인증숏을 올리고 있다”라고 전했다. 대개 전시 후기는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을 올리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신문을 읽는 행위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아 올린다고 한다. 신문 읽는 경험 자체가 20대에게는 이미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는 흥미 있는 이벤트가 된 것으로 보인다. 전시 공간을 1990년대까지도 볼 수 있었던 도서관의 신문 진열대 느낌이 나도록 설계한 것도 관람객들의 마음을 끄는 요소다.

그 시절엔 왜 문학인과 미술인이 함께 어울려 다녔을까. 지금은 문학인과 미술인이 다 각자의 예술 영역에서 따로 활동하는데 말이다. 2번 방은 전시를 보기 전에 가진 이런 궁금증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정지용 이상 김기림 김광균 등 시인과 이태준 박태원 등 소설가들이 정현웅 이상범 노수현 안석주 김환기 이쾌대 등 미술인과 교유하는 무대를 제공한 것은 이른바 인쇄미술이었다. 미술인들은 신문 소설에 삽화를, 문학 잡지와 시집의 표지화를 그렸다. 특히 1919년 3·1운동에 놀란 일제가 문화 통치로 돌아서면서 발간되기 시작한 민간 신문은 가장 트렌디한 매체였다.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매문사, 1925, 근대서지연구소 소장

그때 신문 소설은 신문의 발행 부수를 좌우하는 최대 요인이었고 그래서 신문 삽화는 당대 최고의 미술인들이 섭외됐다. 한국화가 노수현, 이상범 등도 신문 삽화를 그렸다는 게 흥미롭다. 노수현은 이태준의 신문 소설 ‘딸 삼형제’에도 삽화를 그렸고, 이상범은 주요한 소설 ‘사막의 꽃’에 삽화를 그렸다. 이상범은 한국화에서는 몽롱한 산수로 유명하지만, 삽화에서는 얼굴을 그릴 때 이마 부분은 잘라내고 눈과 코만 드러내는 등 표현이 과감했다. 대중소설이 많았던 만큼 에로틱한 ‘목욕 장면’도 자주 나왔다. 신문 삽화는 화가들이 서구로부터 새롭게 수용한 전위적 미술 사조를 실험하는 장이기도 했다. 안석주가 대표적인데, 그의 삽화에는 러시아 구성주의, 입체파 등 다양한 형식을 실험하는 게 엿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화가 이승만이 월탄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피’에 그린 삽화의 원화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신문 삽화와 원화를 비교 감상하는 것도 재미다.
구본웅 '친구의 초상', 1935년 작, 캔버스에 유채, 62×5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부 전위와 융합에서는 신문 삽화를 매개로 교유했던 예술인들이 오프라인 공간인 다방과 술집에 모여 앉아 시대의 부조리를 비판하며 ‘전위’를 외쳤던 상황을 보여준다. 화가 구본웅의 야수파적인 유화 <여인> 등은 그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 이상과 박태원이 함께 봤던 프랑스 감독 르네 클레르의 반파시즘 영화 ‘최후의 억만장자’도 전시장에서 상영돼 경성의 지식인들이 느꼈던 암울한 분위기를 교감할 수 있다. 3전시실은 누가 누구와 친했는지, 각 인물 간의 상호 관계를 보여주고 4전시실에서는 김용준, 장욱진 등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지녔던 화가들의 글과 그림을 볼 수 있다. 5월 30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