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국가대표 인교돈(29)은 ‘3회전의 승부사’로 불린다. 1회전에서 상대를 관찰하고 2회전에서 공략할 곳을 찾아 3회전에서 승부를 내기 때문이다. 그의 발은 신중하게 움직이다가도 타격 지점을 찾으면 전광석화처럼 상대의 몸통으로 날아든다. 그가 ‘태권도 명가’ 용인대 소속으로 전국체전 금메달을 쓸어 담을 때 국내 남자 87㎏ 이상급에선 이미 경쟁자를 찾기 어려웠다. 올림픽 유망주로 꼽혔던 그에겐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가 청천벽력 같은 암 판정을 받은 건 스물두 살이던 2014년이었다. 혈액암의 일종인 림프종 2기였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단련해온 불굴의 태권도 정신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5년 만에 암을 정복하고 도쿄올림픽 본선행 진출권을 손에 넣었다. 이제 그의 나이는 스물아홉 살. 생애 처음으로 도전하는 올림픽에서 또 한 번의 ‘인생 승부’를 준비하고 있다. 인교돈은 설 연휴를 맞아 고향 방문 길에 올랐던 10일 국민일보를 찾아 “축제를 즐기는 마음으로 올림픽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인교돈은 코로나19로 국제대회가 일제히 중단된 지난해부터 소속팀 한국가스공사 태권도단의 대구 숙소에 머물며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다. 휴일에는 가족이 있는 인천에서 시간을 보낸다. 지금은 집에 가는 발걸음이 가볍지만, 항암치료를 시작했던 7년전 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당시 목에 돋아난 혹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인교돈은 가족의 권유로 찾아간 병원에서 악성 림프종 진단을 받았다. 전이 속도가 빠른 림프종은 활동량이 많은 운동선수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병이다.
인교돈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진단 결과를 확인하러 간 병원에서 악성 림프종이라는 말을 들었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됐다. 10분 넘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진단 이후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한동안 운동도 안했다”고 말했다.
인교돈은 2014년 8월 수술을 받고 한 달 뒤부터 항암제 투약을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빠졌고, 구역질이 몰려왔다. 의사는 무균실 입원을 권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운동장에서 멀어지는 거리만큼 정신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인교돈은 오히려 가족과 의사를 설득해 용인대 기숙사에 남았다. 그리고 항암치료를 받는 날에만 병원을 찾기로 했다.
인교돈은 “학교에서 운동할 수는 없었지만 동료들이 뛰는 모습만 봐도 답답한 기분이 풀렸다”며 “어느 하루는 동료에게 겨루기를 요청했는데, 독한 항암제의 영향으로 대련 시작 10초 만에 구토가 나와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날은 정말 괴로웠다”고 했다.
항암치료는 해를 넘겨 이어졌다. 다행히 성과는 있었다. 치료는 곧 정기검진 수준으로 간소화됐고, 몸에 운동할 힘이 쌓였다. 인교돈은 그리웠던 체육관으로 돌아가 선수로 복귀했다. 대련에서 패하는 날도 있었지만 기량이 빠르게 회복됐다. 그렇게 운동과 치료를 병행하던 2019년 8월, 반가운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해 올림픽 랭킹 2위를 유지해 본선행을 확정하는 겹경사도 맞았다.
인교돈은 “마지막으로 진료실 밖으로 나올 때 의사, 간호사, 그리고 병원에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쳐줬다. 이제 병원으로 올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당시 머릿속에는 올림픽 출전 준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암을 이겨낸 인교돈은 펄펄 날기 시작했다. 2019년 9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연맹 월드그랑프리에서 같은 체급 올림픽 랭킹 1위 빌라디슬라브 라린(26·러시아)을 처음으로 꺾었다. 3회전까지 3-5로 끌려가던 승부를 경기 종료 3초 전 라린의 머리에 왼발을 꽂아 넣고 6대 5로 역전승했다. ‘3회전의 승부사’라는 명성을 되찾은 순간, 올림픽 시상대 가장 높은 곳이 눈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인교돈의 세계 랭킹은 올림픽 종목에 없는 87㎏ 이상급에서 1위다. 올림픽의 최고 중량 체급은 80㎏ 이상급인데, 올림픽 랭킹 1위인 라린은 87㎏ 이상급에서 2위다. 태권도에서 가장 건장한 체구를 가진 선수들의 체급에서 인교돈과 라린은 올림픽 금메달 경쟁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교돈은 자만하지 않는다. 그는 “태권도에서 방심하는 순간에 다 잡았던 승리를 놓칠 수 있다. 어느 선수가 강하다고 지목할 수 없다. 같은 체급에선 기량 차이보다 자신만의 타격 순간이나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며 “우선 도쿄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우려했다.
인교돈은 불확실한 올림픽 출전 여부보다 생활고에 놓인 주변의 태권도인들을 더 걱정하고 있다. 그는 “코로나19 확산으로 1년을 넘긴 체육인들의 사투는 국가대표의 고충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태권도 체육관을 운영하거나 선수를 지도하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한숨 소리가 깊어지고 있다”며 “그래서 올림픽이 열려 출전하게 된다면 내 자신이 아닌 모든 태권도인의 승리를 선언하는 장으로 만들고 싶다”고 기대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