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처럼 ‘할 말은 하는 사람’ 많아지길”[인터뷰]

입력 2021-02-09 00:05
배우 최수영. 사람엔터테인먼트 제공

단아(최수영)의 사전에 인류애는 사라진 지 오래다. 굴지의 대기업 ‘서명그룹’의 유일한 적통.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후계자 순위에서 번번이 밀렸다. 아버지의 후처가 낳은 연년생 동생은 아들이라 단아가 애써 얻으려 한 모든 걸 가질 수 있었다. 온전히 내 편 없는 형제들 사이에서 명확하게 선을 긋고 살았다. 반드시 자기 손에 쥔 패가 많아야 직성이 풀렸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았다. 말에 뼈를 담았고, 표정은 서늘했다. 권위를 내려놓고 실력으로 맞섰다. 손에 든 텀블러, 가벼운 캐주얼 차림에 운동화는 트레이드 마크였다. ‘여자가 봐도 멋진 여자’라는 수식어가 단아 뒤에 따라붙었다.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런 온’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로 소통하고 관계를 맺으며, 사랑을 향해 달리는 이야기다. 결말도 단아다웠다. 한 계단 더 올라가기 위해 영화(강태오)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은 단아라서 가능했던 마지막이다. 단아를 연기한 수영은 8일 국민일보와의 화상인터뷰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2030세대의 감성과 언어를 잘 녹여낸 작품”이라며 “어른들이 ‘정말 요즘 애들 생각이 저래?’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 세대가 지닌 고민을 충분히 담았다”고 말했다.

드라마 '런 온' 중 한 장면. 사람엔터테인먼트 제공

배우 최수영 인터뷰 일문일답
Q.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기분은 어땠나.
“정말 차가운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캐스팅 제안을 받고 ‘나와 단아가 어떤 면에서 닮았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어요.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 보여준 적 없던 캐릭터라 신이 났어요. 작가님이 제가 출연한 작품을 모두 보셨더라고요. 제가 어떤 마음으로 연기를 했는지도 알고 계시는 느낌을 받았어요. ‘단아를 연기할 배우는 수영씨밖에 없다고 생각해요’라는 말을 해주셨는데, 그 말을 듣고 고민이 사라졌어요.”

Q. ‘성별이 역전된 재벌 캐릭터’라는 평가가 있었다. ‘나 이런 음식 처음 먹어봐’ 같은 대사는 주로 남자들이 하지 않았나.
“대본을 읽을 때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방송이 나간 후 그런 반응을 접했죠. 연기할 때는 딱히 남자들이 해야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단아 같은 여자가 할 법한 말이라고 생각했죠. 저는 몰랐지만 아마도 작가님은 성별 역전 코드를 염두에 두고 쓰셨을 것 같아요. 모든 캐릭터에 그렇게 큰 그림을 그리시는 분이라서(웃음).”

Q. 단아를 연기하며 ‘소녀시대’ 생각을 했다던데.
“멀리서 보면 처음부터 모든 게 다 주어진 것처럼 완벽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완벽함을 유지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고군분투하면서 산다는 점이 비슷해서요. 한창 ‘소녀시대’로 활동할 때 그랬거든요.”

Q. 특히 2030 세대의 공감을 얻었다. 드라마 인기 비결은.
“우리 드라마는 ‘요즘 애들 정말 그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2030세대의 고민을 적나라하게 녹였어요. 지금까지 청춘 드라마는 현실적이라기보다 드라마 같은 느낌이 있었거든요. 먼발치에서 우리의 삶을 가늠해서 쓴 드라마가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로 느껴졌을 것 같아요.”

드라마 '런 온' 중 한 장면. 사람엔터테인먼트 제공

Q. 지금 단아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단아는 이제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아마도 조금은 눈치를 보고, 배려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요? 여성 리더가 지녀야 할 사회성을 배워가는 거죠.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여전히 부딪히고 배우면서 부족하지만 열심히 살고 있을 것 같아요.”

Q. 단아는 선을 지키는 외로운 인물이었다. 수영과 얼마나 비슷한가.
“저도 일탈을 좋아하지 않아요. 겁이 많고 안전함을 최고로 여기는 단아와 매우 닮아있죠. 선이 명확하다는 점도 비슷해요. 그보다 더 닮은 점은 누군가 그 선을 넘어와 주길 기다린다는 거죠. 단아는 겉보기에 어려운 사람인 것은 맞지만, 내면에 따뜻함을 갖고 있거든요. 저도 알고 보면 참 털털하고 어려운 사람이 아니에요. 상대방이 선을 넘어와 주는 순간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 같아요. ‘이 사람이 나와 가까워지려 이렇게 다가와 주는구나’하며 감사할 것 같아요.”

Q. 단아와 다른 점도 있을 것 같다.
“단아의 완벽주의 성향을 저도 갖고 있긴 한데, 단아처럼 분노 조절을 못 하지는 않아요(웃음). 그게 좀 다른 것 같아요.”

Q. ‘걸크러쉬’라는 반응이 많았다.
“단아처럼 할 말은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벽을 깨고 헤쳐나가는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맥락에서 미주(신세경)도 매력적이었죠. 세상이 한없이 자신을 거절해도 개의치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해 길을 개척하잖아요. 미주의 자존감이 참 멋졌어요.”

Q. 결국 이별을 택하는 결말은 어땠나.
“정말 단아 같은 결말 아닌가요?(웃음). 매우 마음에 듭니다. 단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단아의 선택을 완성한 존재는 영화의 어른스러움이었고요. 단아는 영화를 통해, 영화는 단아를 통해 그리고 이별을 통해 서로 어른이 되었죠.”

Q. 단아가 어떤 인물로 남길 바라나.
“욕심 엄청 많지만, 그게 밉지는 않은 사람이요. 그러려면 ‘정의로운 욕심’이어야겠죠? ‘우리 단아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응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Q. 주옥같은 명대사가 많았다.
“미주가 단아에게 한 말 중에 ‘우리 너무 이 악물고 살지 맙시다. 턱 아프잖아’라는 대사가 있어요. 우는 장면이 아닌데 울컥해서 참느라 고생했어요. 미주가 단아에게 하는 말이면서, 세경이가 수영이에게 하는 말 같았어요. ‘네가 믿어주면 내가 한 번 믿어볼게’라는 말도 애틋했어요. 이 드라마가 제게 그런 존재였거든요. 제가 작품을 믿은 만큼, 작품도 제게 큰 위로를 선물했어요.”

드라마 '런 온' 중 한 장면. 사람엔터테인먼트 제공

Q. 날카로운 단아 캐릭터에 몰입해 겪은 에피소드는 없나.
“있었어요(웃음). 얼마 전 식당에 가서 ‘사장님 이 양념장 너무 맛있어요’라고 말했더니, 사장님께서 ‘그럼 더 드릴까요?’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아니요’라고 답했더니 주변에서 웃더라고요. 따뜻하지만 매몰찬 게 마치 단아 같다고요. 저는 정말 맛이 있다는 말이었어요. 더 필요하진 않았고요. 그때 단아의 순간들이 떠올랐어요. 의도와는 다르게 오해를 줬던 일들이 스치면서 ‘단아는 이런 생각을 했겠구나. 또 상대는 이렇게 받아들였겠구나’ 깨닫게 됐죠.”

Q. 올해 벌써 ‘런온’과 ‘새해전야’ 두 작품을 공개했다. 향후 계획은.
“아직 연기 갈증이 커요. 도전해보고 싶은 배역이 많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을 이끌며 화자가 되는 주인공이나 강한 캐릭터도 해보고 싶어요. 아직 (아이돌 출신) 배우 최수영을 섭외하는 것은 모험이라고 생각하는 연출자도 많은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잘하는 것이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