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소년처럼 해맑은 눈웃음. 하지만 마운드에 오르면 그 눈빛이 강렬하게 돌변했다. 공 끝은 더 사나웠다. 당대 내로라할 타자들의 방망이가 그의 공에 닿지도 않고 연신 헛돌았다. 프로야구 KBO리그 통산 16시즌에서 삼진으로 돌려세운 승부만 1661차례. 올해로 40년째를 맞이한 KBO리그에서 이보다 더 많은 탈삼진 기록을 보유한 투수는 송진우(2048개)·이강철(1751개)·선동열(1698개)·양현종(1673개)뿐이다. 자신을 길러낸 ‘독수리 둥지’로 돌아와 2년째 선수단을 이끄는 정민철(49) 한화 이글스 단장의 현역 시절 얘기다.
정 단장은 한화의 전신 빙그레에 입단한 1992년 데뷔 시즌에 14승(4패)을 달성하고, 그대로 1999년까지 8시즌 연속으로 매년 두 자릿수 승수를 쌓았다. 정 단장의 기량이 정점에 올랐던 1999년은 한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시리즈를 정복한 시즌이다. 정 단장은 그해 한국시리즈 1·4차전에 등판해 모두 승리했다. 이런 활약에도 골든글러브 수상 이력을 쌓지 못할 만큼 상복이 부족했지만, 1990년대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우완 정통파 투수로 평가됐던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제 단장 2년차로 넘어왔다. 올해는 정 단장이 ‘이글스맨’으로 살아온 지 30년째를 맞이한 해다. 정 단장은 어떤 밑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정 단장은 4일 경남 거제 하청스포츠타운 스프링캠프에서 올해의 한화를 ‘새 출발’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새 출발이라니. 부진했던 지난 시즌을 잊고 분위기를 반전하려는 모든 종목 프로 구단의 새 시즌 목표가 아니던가. 하지만 한화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한화는 지난해 KBO리그를 최하위(10위)로 완주한 뒤 뼈를 깎는 수준으로 코치진과 선수단을 재편성했다. 지도자부터 베테랑 선수 상당수가 은퇴하거나 방출됐다. 1986년 빙그레로 창단해 지금의 한화로 이어진 구단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감독까지 불러왔다. 굳이 미래의 목표로 삼지 않아도 지금의 한화는 새로운 출발선에 있다.
정 단장은 “올해 한화 선수단 구성에 큰 폭의 변화를 줬다. 구단 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 선임이 그 출발점”이라며 “이미 지난 포스트시즌(지난해 11월) 이전부터 외국인 감독 영입 작업이 진행됐다. 화상 면담으로 후보들을 물색했고, 최종 후보군으로 압축한 뒤에는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말했다.
정 단장은 스프링캠프부터 한화 선수단을 지휘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국적의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을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직접 만나 지휘권을 맡겼다. 수베로 감독은 2001년부터 2015년까지 미국프로야구 마이너리그에서 다수의 팀을 지휘하며 여러 유망주를 발굴했다.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는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어스의 1루 및 내야 코치를 지내며 데이터 기반 팀 리빌딩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평가를 받은 지도자다. 정 단장은 “유력 후보군 가운데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있던 수베로 감독의 준비가 가장 잘 돼 있었다. 육성에 특화된 지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한화가 외국인 사령탑을 물색한 시기는 김태균의 은퇴, 안영명(KT 위즈)·이용규(키움 히어로즈)의 방출 시기와 겹친다. 1980~1990년대 한화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구성했던 장종훈 육성군 총괄을 포함한 코칭스태프 상당수도 그 시기에 떠났다. 파격적인 세대교체가 단행됐다. 곳곳에서 원성과 비난이 날아들 것으로 생각했지만 정 단장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떠나는 선후배 중 일부에서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정 단장은 “구성원 23명을 만나 (작별을) 통보했다. 괴로웠다. 야구는 스포츠지만, 종사자에게 생계가 걸린 일이다. 그들은 나에게 선배이고 동료이며 후배다. 한화의 세대교체를 위해서는 피할 수 없었다”며 “그 과정에서 충격을 받았다. 한화의 세대교체를 공감해 구단의 (재계약 불가) 통보를 지체하지 않고 수용한 지도자·선수도 있었다. 한화를 위해 큰 결단을 내린 그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정 단장의 고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세대교체도 결국 이전 세대가 머물렀던 자리를 새롭게 채울 세대가 등장할 때 가능한 일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신규 유입. 한화는 수베로 감독과 대럴 케네디 수석코치, 호세 로사도 투수코치, 조니 워싱턴 타격코치를 영입해 지휘체계를 모두 외국인으로 구성하는 첫 시도를 감행했다. 하지만 내년과 그 이후를 바라본다면 프랜차이즈 스타를 길러내야 한다. 선수 육성체계는 팀의 정체성도 걸린 과제다.
정 단장은 “선수 육성을 놓고 언제나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구단의 미래를 생각하면 팜(farm)을 제대로 운영해야 한다”면서도 “하지만 한화는 프로 구단이다. 팬들은 시간과 비용을 할애해 경기를 관전한다. 이에 대한 보답을 받을 자격을 가졌다. 프로 구단은 마땅히 승리로 팬들에게 보답해야 한다. 육성에만 집중해 성적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베로 감독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3년 임기 안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고 싶다는 의사도 말했다. 단장으로서는 그 목표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차근차근 반등할 것이다. 그 연속성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수베로 감독은 스프링캠프에서 선수들에게 ‘실패할 자유’를 주문하고 있다. 공격적인 투구, 공격적인 주루로 무엇이든 시도하라는 취지다. 정 단장은 “선수단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고 있다. 수베로 감독의 구상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구단의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바로 그 지원에 내 역할이 있다”고 규정했다.
정 단장은 2009년 현역에서 은퇴해 단장을 맡기 전까지 10년간 투수코치, 야구 해설위원을 거쳐 왔다. 워낙 입담이 좋기로 유명한 정 단장이지만, 지금의 직을 맡은 뒤로는 입심이 약해졌다는 주변의 반응도 나온다. 단장의 발언에 실리는 무게감을 알아서다. 그래도 스프링캠프 기간 중 곳곳에서 걸어오는 말들을 외면하지 않고 응답하며 훈련장 분위기를 환기하고 있다. 기자와 훈련장 주변을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던 중 다가온 팬의 사인 요구를 응하며 “또 만나자”고 인사하기도 했다.
정 단장과 산책을 끝낼 때쯤, 한국시리즈 마운드에 올랐던 과거의 긴장감과 단장 2년차를 출발하는 지금의 부담감 중 어느 쪽을 더 무겁게 느끼는지를 물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정 단장은 “지금”이라고 답했다.
거제=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