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만의 ‘무죄’…“고문 경찰관들, 어떻게 용서하겠나”

입력 2021-02-04 15:03 수정 2021-02-04 15:26
경찰 고문에 못 이겨 살인죄 누명을 쓴 채 21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낙동강변 살인사건' 피해 당사자 최인철(왼쪽)씨와 장동익씨가 4일 오전 부산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선고 공판을 마치고 꽃다발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겠어요, 그 사람들은 악마입니다.”

살인 누명을 쓰고 21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낙동강변 살인사건’ 피해 당사자들 중 한 명이 4일 한 말이다. 피해자들은 이날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누명을 벗었지만 기쁨을 만끽하는 대신 “다시는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 당사자인 최인철씨와 장동익씨는 이날 부산고법에서 이뤄진 재심 재판 직후 그간의 억울했던 감정을 토해냈다. 최씨는 “무죄가 나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며칠 잠을 못 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누명을 벗었다고 생각하니 기쁘고, 다른 일을 해서 힘을 내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고문 경찰관에 대해서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겠느냐”면서 “그 사람들은 악마”라고 강조했다. 이어 “절대 용서란 없다. 복수보다 관용을 베풀고 그 사람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 생각했지만 재판에서도 부인하는 모습을 봤는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겠느냐”고 덧붙였다.

최씨는 재판 전에도 법정 앞에서 “저는 고문한 경찰관의 공개를 원한다”며 “왜 피해자는 공개하면서 가해자는 공개하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또 “당시 사하경찰서 형사 7반이 수사했는데 2명은 고문에 가담 안 했고 형사 주임부터 6명이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장씨는 “33세에 수감될 때 아내는 29세였는데 지금은 딸이 24세가 됐고 아내는 51세가 됐다”면서 “저와 같은 사람이 더 있어서는 안 된다. 100명의 진범을 놓쳐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뭐가 잘되고, 잘못된 건지 확실히 구별하고 형을 집행하도록 하는 게 가장 큰 바람”이라며 “검찰도 경찰이 조사한 걸 그대로 공소장을 만들 게 아니라 확실히 알고 형을 집행했으면 하는 큰 바람이 있다”고 했다.

고문 경찰관 공개와 관련해 이들의 변호를 맡은 박준영 변호사는 “공개하면 명예훼손 문제가 생긴다”면서 차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박 변호사는 “법정에 나온 경찰, 고문하지 않았다고 말한 경찰, 여전히 사건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는 경찰들을 위증으로 고소하고 국가배상 청구 소송의 피고로 삼을 생각도 하고 있다”며 “지금이라도 두 분에게 무릎 꿇고 사죄한다면 두 분의 닫힌 마음이 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피해 당사자 최인철씨, 박준영 변호사, 장동익씨. 연합뉴스

부산고법 제1형사부(부장판사 곽병수)는 이날 강도살인 피의자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최씨와 장씨가 제기한 재심청구 선고 재판에서 두 사람에게 강도살인 혐의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최씨에 대해서는 공무원 사칭에 대해 일부 유죄 취지로 6개월 선고유예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경찰의 체포과정이 영장 없이 불법으로 이뤄졌고, 수사 과정에서의 고문 행위도 피해자들의 일관된 진술과 당시 수감된 주변 사람들의 진술 등을 종합해 보면 인정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낙동강변 살인사건은 1990년 1월 4일 낙동강변에서 차를 타고 데이트하던 남녀가 괴한들에게 납치돼 여성은 성폭행당한 뒤 살해되고 남성은 상해를 입은 사건이다. 사건 발생 1년10개월 뒤 최씨와 장씨는 살인 용의자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재판에 넘겨져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1년간 복역한 끝에 2013년 모범수로 출소했다.

이들은 검찰 수사 때부터 경찰에게 고문을 당해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2019년 4월 대검 과거사위원회가 이 사건을 조사하고 ‘고문으로 범인이 조작됐다’는 결과를 발표하면서 재심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최씨 등은 2017년에 이어 2018년 1월 재심청구서를 다시 제출했고, 부산고법은 6차례에 걸쳐 재심 개시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심문을 벌여 재심을 결정했다. 이번에 무죄가 선고되면서 이들은 사건 발생 31년 만에 누명을 벗게 됐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