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복싱을 완성시켜 세계에 보여줄래요” ‘무도가’ 오연지의 올림픽 도전

입력 2021-02-02 10:57
지난해 11월 진천선수촌 복싱장에서 포즈를 취한 오연지의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진천선수촌 복싱장. 마무리 훈련까지 마친 뒤 땀범벅이 된 여자 복싱 라이트급(60㎏) 오연지(31·울산시청)는 매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다른 선수들이 짐을 챙겨서 숙소로 돌아갈 때까지, 오연지는 한 동안 두 눈을 감은 채 무언가 기도를 올렸다. 마치 복싱장과 하나가 된 것처럼 집중한 오연지에겐 무림 고수의 아우라가 풍겼다. 훈련 중간 마주친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완전히 복싱에 빠져 원투를 내지르는 오연지의 모습엔 비장한 기운마저 풍길 정도라, 무언가 말을 걸기가 힘들었다.

31일 오연지와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이런 진중한 모습들에 대해 묻자, 오연지는 “저는 잘한다기보다 열심히 하는 선수고, 노력이 모여 성적이란 결과물이 나오는 것 같다. 매일 운동할 때마다 부족한 느낌이 들어 좀 더 하려고 집중하는 편”이라며 “훈련이 끝나고 나선 안 다치고 운동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제게 주신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더 진실 되게 운동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정신을 가다듬는다”고 설명했다.

오연지는 자타공인 아시아 최강의 선수다. 2019년까지 전국체전 9연패. 2015년과 2017년엔 아시아복싱연맹(ASBC)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여자복싱 사상 최초로 2연패를 달성했고,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선 한국 여자복싱 사상 첫 금메달을 땄다. 같은해 국제복싱협회(AIBA) 세계여자복싱선수권대회에선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지난해 3월 도쿄올림픽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에선 금메달을 획득해 임애지(22·한국체대)와 함께 도쿄행 티켓을 따냈다.

오연지가 처음 글러브를 낀 순간부터 강자였던 건 아니다. 전북 군산이 고향인 오연지는 중학교 시절 국가대표 출신인 외삼촌(전진철)이 운영하는 체육관에서 복싱을 처음 접했지만, 처음엔 단순히 운동이 좋아 놀러 다니는 정도라 선수 생활을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무서웠어요. 상대를 때려야 하는 것도, 맞아야 하는 것도요. 지금이야 선수 생활을 하다 보니 경기를 포인트로 생각하지만 복싱을 모를 땐 그냥 싸우는 것 같았거든요.”

지난해 요르단 암만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에 참가한 오연지가 대회 개막을 하루 앞두고 몸을 풀고 있다. 뉴시스

외삼촌은 그런 오연지가 복싱 선수로 성장하는 데 멘토 역할을 했다. 168㎝의 큰 키에 팔까지 긴 오연지의 신체조건엔 외삼촌의 ‘아웃복싱’ 스타일이 안성맞춤이었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외삼촌의 독려로 복싱을 연마한 오연지는 2008년 국가대표로 아시아선수권에 나가게 되면서 복싱 선수의 길을 걷겠단 생각을 굳히게 됐다고 한다. 2011년 전국체전, 2012년 런던올림픽에 여자복싱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건 오연지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처음 단 태극마크가 저에게는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정식종목 채택이 된 뒤엔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이 됐죠.”

오연지에게도 올림픽 무대는 다르다. 런던올림픽 땐 국내 선발전에서 미끌어졌다. 2016 리우올림픽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에선 태국 선수를 만나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편파 판정으로 탈락해 눈물을 삼켜야 했다. 30대가 돼서야 오연지는 올림픽 첫 출전 기회를 얻게 됐다. 이에 오연지는 더욱 훈련에 매진한다. 매일 새벽·오전·오후 3번씩 강도 높은 기술-체력 훈련을 병행하며 구슬땀을 흘린다. 대표팀 지도자들이 “연지는 항상 진지하고 너무 열심히 해서 꾸중할 필요가 없을 정도”라고 입을 모을 정도.

“리우올림픽 예선에서 진 걸 편파판정 탓이라 하고 싶진 않아요. 제가 진짜 완벽히 했다면 탈락도 없었겠죠.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정해준단 말이 있어 메달을 장담할 순 없지만 다른 선수들보다 더 열심히 준비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올림픽에선 아시아에서 자주 붙어본 선수들보다 체격 조건이 좋고 복싱 스타일도 다른 선수들을 만나게 돼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복싱 대표팀은 2006·2008 AIBA 세계선수권 70㎏급 우승자 출신인 아리안 포틴(37·캐나다) 코치를 첫 여성 지도자로 영입했다. 지난달 중순부터 오연지와 훈련을 시작한 포틴 코치는 “한국 선수들은 북미 선수들보다 거리재기를 잘하고 발이 가벼워 아웃복싱을 잘하는 게 장점이라 올림픽 메달을 딸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한다”며 “그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가까이 붙었을 때 더 여러 가지 공격 선택지를 가져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인사이드 파이팅 방식을 접목하려 한다. 뒷손 활용법도 가르치고 싶다”고 목표를 밝혔다. 오연지도 “정상에 위치했던 분이라 배울 점이 많다”며 화답했다.

함께 올림픽에 진출하게 된 임애지의 존재도 오연지에겐 힘이 된다. 조용한 성격의 오연지와는 달리 10살 가까이 차이 나는 후배 임애지는 붙임성이 있다. 오연지는 “같이 준비한다는 기분을 공유할 수도 있고 말도 잘 붙여줘서 덜 외롭고 부담도 덜게 된다”고 말했다.

오연지(오른쪽)가 지난 1일 축북 충주의 한 복싱장에서 포틴 코치와 대표팀 복싱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복싱 대표팀 제공

오랜 시간 복싱밖에 몰랐던 오연지는 최근 복싱선수가 아닌 ‘나 자신’을 찾는 일에도 재미를 붙였다. 가장 즐겨 먹는 음식을 잘하는 맛집을 찾아다니고,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을 쇼핑하며 적극적인 휴식을 취하게 된 이유도 그래서다. “최근 마라탕에 빠졌고, 저에게 가장 좋아하는 초록색 계열의 휴대폰 선물도 해줬어요. 예전에는 그냥 쉬면 그게 휴식인줄 알았는데, 그것보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하고 일상으로 돌아와 운동할 때 덜 지치더라고요. 제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었는데 이제 조금씩 저 자신을 알게 된 것 같아요.”

훈련장 바깥에서 여느 또래와 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는 여유까지 갖게 된 덕분일까. 정사각형 링 위에 선 오연지는 단순한 선수가 아닌 ‘무도가’ 같은 기운을 풍긴다. 복싱선수로서의 그가 가진 목표도 무도가 답다. “사람마다 신체구조도 다르고 원투를 뻗는 느낌도 자세도 스타일도 모두 달라요. 그래서 복싱엔 정답이 없어요. 전 제 몸에서 나오는 복싱이 ‘정답’이 되도록 하는 게 목표입니다.”

오연지는 올 여름 도쿄의 링에서 ‘정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훈련장에서 흘린 땀방울의 무게만큼 그는 자신있다. “지금까지 올림픽을 위해 열심히 준비해오고 달려왔어요. 그토록 바라고 선망하던 올림픽 무대에서 제 복싱을 할 수 있는 만큼 펼쳐 보이고 싶네요.”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