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한 상태에서 사고가 나 움직일 수 없는 차량에 시동을 걸고 주행을 시도한 경우 음주운전으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이 운전자는 대리운전기사가 사고를 낸 뒤 사라지자 운전을 시도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법원은 “차가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3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도로교통법 위반(음주운전)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31일 밝혔다. 이 재판의 쟁점은 만취한 사람이 사고가 나서 움직일 수 없는 차에 시동을 걸고 가속 페달을 밟은 경우 음주운전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였다.
A씨는 2016년 1월 회식 후 귀가하기 위해 대리운전기사를 불렀다. 기다리던 중 당초 부른 기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대리운전을 해주겠다”고 하자 A씨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대리운전기사는 사고를 낸 뒤 도로 가운데 차를 세워놓고 자취를 감췄다. 깨어난 A씨는 시동을 걸고 기어를 조작한 뒤 가속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사고로 파손된 차는 움직이지 않았고, 목격자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했다. 검찰은 A씨 행동은 음주운전에 해당한다며 재판에 넘겼다.
1·2심은 A씨가 음주운전을 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봤다. 각 재판부는 “시동을 걸고 기어를 조작하고 액셀을 밟는 행위는 차를 이동하기 위한 일련의 준비과정에 불과하다”고 봤다. 아울러 “음주 상태에서 실제로 자동차를 이동했을 때 음주운전의 위험성이 현실화된다”며 A씨 행동은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실제로는 차가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미수범에 그치고, 음주운전은 미수범을 처벌하는 조항이 없으므로 무죄라는 게 법원 판단이었다. 대법원도 “원심 판단에 도로교통법상의 운전에 관한 법리오해가 없다”며 A씨는 무죄라고 판단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