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의 행적과 승평부의 읍민들이 팔마비를 건립한 사실은 ‘고려사’의 열전(列傳)에 나타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승평부에서는 수령이 교체되면 말 8필을 기증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최석은 승평부에서 기증한 말을 타고 비서랑의 관직을 받아 개성으로 떠난 후 자신이 기증받은 말과 자신의 말이 승평부에 있을 때 낳은 망아지까지 돌려보냈다. 이후로 승평부에서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에게 말을 기증하는 폐단이 사라졌고, 읍민들은 최석의 청렴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석은 고려말 처음 건립된 이후 1300년대 초반 쓰러졌으나 다시 세워졌고, 이후 정유년(1597년, 선조 30)의 병란으로 완전하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1616년 부사로 부임해 온 이수광에 의해서 1617년 다시 건립됐고, 현재까지 온전히 전해지고 있다.
이수광이 중건한 팔마비의 ‘팔마비(八馬碑)’ 세 글자는 진사 원진해(元振海)의 글씨이고, 뒷면에 기록된 음기(陰記·비석 뒷면에 새긴 글)는 이수광이 짓고 동지사(同知事) 김현성이 글씨를 썼다.
문화재청은 이 비석이 지방관의 표상으로 400년 이상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에서 보물로서 역사, 예술, 학술 가치가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문화재청은 아울러 ‘공주 갑사 대웅전’ ‘의성 대곡사 범종루’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