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정인이 사건’ 터진들… 지자체 이름뿐인 아동보호시스템

입력 2021-01-19 18:03
'정인이 사건' 피의자 입양모에 대한 1차 공판기일인 13일 오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 앞에서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회원들과 시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국민일보DB

아동학대 예방을 위해 전국에 ‘아동복지심의위원회’(심의위)와 ‘아동학대 대응 정보연계협의체’(협의체)등 보호 시스템이 설치돼 있지만 제대로 운영되지 않거나 구성원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정인이 학대 사망사건’이 발생한 후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앞다퉈 심의위와 협의체를 강화하겠다고 나서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불만 섞인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19일 보건복지부를 통해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25개 자치구에서 심의위는 모두 72번 개최됐다. 아동복지법이 2016년 개정되면서 만들어진 심의위는 아동학대를 포함해 기관이나 관련 시설이 보호하는 아동의 보호와 퇴소 조치 등을 다룬다. 일반적으로 지자체장이 위원장을 맡고 보건소장이나 아동학대 전담 공무원, 변호사 등이 위원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자치구마다 심의위 개최 횟수 편차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에선 노원구가 7차례 심의위를 연 반면, 중구에서는 한 번도 심의위가 열리지 않았다. 경기도에서는 107번 심의위가 열렸는데 남양주시에서는 12회 개최했으나 연천군에선 아예 열리지 않았다. 서울 중구 관계자는 “코로나19 여파로 지난해 심의위를 열지 못했다”면서 “위원 간 일정을 맞추기 어려워 실무자끼리 연계해 여러 건의 아동학대 사례를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정인이 사건’이 발생한 양천구에서는 지난해 3번 심의위가 열렸지만 정작 정인이 관련 사안은 한 번도 본안건으로 다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양천구 관계자는 “(정인이의) 사망과 동시에 경찰 수사가 개시돼 심의위에서 다룰 수 없었다”면서 “경찰에서 검찰 송치 직전 지자체 의견을 물어와 추가 안건으로 다뤘다”고 설명했다.

지자체는 심의위 외에도 ‘아동학대 대응 정보연계협의체’(협의체)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아동학대 징후를 면밀히 포착할 수 있는 의료진이 포함된 협의체가 거의 없어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협의체 내 의료기관 혹은 의료진이 포함된 곳은 수도권 지자체 가운데 서울 송파구와 강남구, 경기도 여주시가 유일했다. 이마저도 한계가 있었다. 강남구에는 정신과 전문의만 협의체에 포함됐고, 여주시는 관내 종합병원 한 곳을 협의체에 포함시켰지만 ‘아동학대 징후가 발견될 시’라는 조건을 달았다. 이외 지자체 중 의료진이나 의료기관이 포함된 협의체는 없었다.

의사 출신인 신 의원은 “아동학대를 꾸준히 추적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징후를 제때 파악할 수 있는 소아과나 소아응급학과 등 의료 전문가가 필요하다”면서 “의심 아동이 병원에 왔을 때 학대 징후가 있다는 것을 의료진이 바로 알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인이 사건’에서도 학대 징후를 포착했던 이는 소아과 전문의였다. 사건 당시 정인이를 처음 진료한 전문의는 학대를 의심했지만 경찰은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잘 열리지도 않고 전문성도 떨어지는 제도들이 사실상 방치돼 있지만 지자체들은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10월 ‘공공 아동보호체계’를 가동하면서 심의위 구성을 10명에서 15명으로 늘리고 내부에 ‘사례결정소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일부 지자체는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하는 조례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양천구 관계자는 “심의위는 상황 발생 즉시 개최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면서 “보완책으로 소위원회를 설치하는 내용의 조례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수도권의 한 아동학대 전담 공무원은 “느낌만 다를 뿐 똑같은 논의가 반복되는 것”이라며 “아동학대 업무를 맡는 실무자들이 곧장 소통할 수 있는 단체 대화방을 만드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지적했다.

지자체 가운데에는 심의위와 협의체를 뒤섞어 운영하는 곳도 있었다. 경기도 양평군은 지난해 협의체 구성원을 심의위원으로 대신했다. 양평군 관계자는 “올해부터 경찰관과 변호사, 지자체 공무원을 추가로 배치하겠다”고 말했다. 서울에서는 ‘여성아동안전지역연대’라는 단체 구성원으로만 협의체를 구성한 지자체도 있었다.

지역에 따라 협의체에 참여하는 경찰의 직급이 지나치게 낮다는 지적도 있다. 경기도 수원시의 경우 협의체에 경정급인 일선서 여성청소년과장이 참석하지만, 안성시는 순경 1명만 협의체에 참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도권의 한 과장급 경찰관은 “아동학대 관련 단체가 하도 많다보니 부하 직원에게 협의체 참석을 떠밀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신 의원은 “조직만 지나치게 많아지면 현장성은 오히려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정리가 필요하다”면서 “아동학대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실무자끼리 상시 소통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윤태 정현수 기자 trul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