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보건 연구자들은 19일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 등 가습기살균제 제조·유통 업체 관계자 전원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 무죄를 선고받은 것에 대해 재판부가 과학적 인과관계의 논리를 잘못 이해했다고 비판했다.
피해자 조사에 참여한 박동욱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이날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판결은 피해자들을 뭉뚱그려 ‘기저질환이 있다’는 식으로 가습기살균제와 (폐질환의) 인과관계를 무시했다”며 “서너살 아이들이 나이가 있어야 걸리는 폐질환을 얻은 이유를 따로 설명할 수 없음에도 개인 인과를 완전히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동물실험 결과 가습기살균제 속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 성분이 폐질환을 유발한다고 보기 어려웠다는 재판부 판단에 대해 “동물실험은 옵션일 뿐”이라며 탈리도마이드, DDT 등 동물실험에서 발견되지 않는 독성도 많다고 지적했다.
한국환경보건학회는 성명을 통해 “재판의 대상이 피고인의 잘못에서 CMIT·MIT의 질환 발생을 입증하는 과학의 한계로 바뀐 것”이라며 “형사사건은 인과관계가 입증돼야 하지만 그 대상은 과학이 규명해야 할 건강 피해자가 아니라 피고인의 범행 의도와 행적”이라고 주장했다.
또 “물질의 유해성 여부는 인체 영향이 가장 중요한 근거”라며 “예를 들어 국제암연구소의 1급 발암물질은 인체에서 충분한 증거가 나오면 지정된다. 실험동물의 증거나 기전적 증거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학회는 업체들이 ▲ CMIT·MIT가 자극성이 강한 물질임을 알면서도 직접 흡입 가능한 제품에 적용했는지 ▲ 독성·유해 불확실성을 인지하고도 나중에 문제가 되자 은폐·축소하려 했는지 ▲ 상호 공모와 책임 회피를 했는지를 재판이 따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변호사인 박태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 사건은 과학에 의존해 재판한 전례 없는 사법과정”이라며 “과학의 진실추구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무결점만 진실로 인정한다면 사실 대부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증언 취지 다르게 인용돼…인과관계 있다”
재판에서 증언했던 안전성평가연구소 이규홍 박사는 이날 연구소 홈페이지에 입장문을 올려 가습기살균제 성분과 사람의 천식 질환 간 인과성을 주장했다. 그는 “재판에서 제 증언이 취지와 다르게 인용되거나 여러 연구 결과 중에서 선별 선택한 것처럼 보여 본래의 증언 취지를 밝히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쥐 실험에서 가습기살균제 성분인 CMIT·MIT를 투여하고 관찰한 결과 조직 병리에서 사람에게 나타난 천식과 비슷한 소견들이 보였다”면서 “폐 세척액 검사에서는 천식 질환 염증에서 나타나는 호산구와의 관련성도 보였다”고 주장했다. 또 “폐기능 검사에서도 미약하지만 과민성 반응을 보였다”며 “쥐 실험을 통해 CMIT·MIT와 사람에서 일어났던 천식 간 인과관계를 설명할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판결문은 CMIT·MIT 성분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폐 섬유화가 관찰되지 않았으며 연구책임자인 이 박사 역시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적시했다. 이 박사는 “쥐 실험을 사람에게 100% 적용할 수 있는지 물어 마우스 모델에 한계가 있음을 말한 것뿐인데 사람의 천식을 전혀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고 비판했다.
이 박사는 ‘CMIT·MIT가 폐 질환·천식의 원인임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질환을 악화시킬 정도의 양이 축적돼야 가능하다’는 판결문 내용도 반박했다. 그는 “판결문에서처럼 독성 작용을 지극히 제한적인 경우로 한정해 인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가습기살균제가 사람에게 지속해서 반복적으로 노출됐다면 세포에 자극을 줘 그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손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10여년간 가습기살균제 독성 연구를 하며 CMIT·MIT와 사람에게 나타난 피해 질환들 사이 인과관계 증거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런 과학적 연구 결과들이 올바르게 받아들여져 사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유영근 부장판사)는 지난 12일 가습기 살균제 사태에 연루돼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CMIT·MIT 성분 가습기 살균제가 폐 질환이나 천식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