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국회’를 표방한 21대 국회에서도 입법과정에서의 부적절한 관행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게 이른바 ‘철회 법안’이다. 의원입법으로 발의했지만 검토 결과 문제점 또는 부작용이 있어 취소시킨 법안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대표적인 부실법안의 유형으로 꼽는다.
국민일보가 21대 국회들어 발의됐다 철회된 법안을 분석한 결과 다수는 법안 관련 이해당사자들과의 조율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의됐다. 철회된 법안 중에는 개정 내용은 같은데 법만 바꿔 적용해 건수를 늘리는 이른바 ‘복붙(복사해서 붙여넣기)’ 법안도 있었다. 발의 건수만 놓고보면 사상 최대인 21대 국회 ‘입법 과잉’의 어두운 그림자이기도 하다.
특히 21대 국회에서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간의 극심한 갈등, 부동산 규제 등을 둘러싸고 여야 간 무리한 입법경쟁이 계속되는 등 국회 스스로가 입법권의 권위를 무너뜨렸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이해관계 조정도 없이 섣부른 발의
국민일보가 11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분석한 결과, 21대 국회의 철회 법안은 58건에 달했다. 19대 국회와 20대 국회에서는 4년간 철회 법안이 각각 172건과 215건이었는데 21대 국회 들어 개원 7개월 만에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이처럼 예년보다 크게 증가한 점을 감안하면 4년간 철회 법안 수도 19대와 20대 국회를 훌쩍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철회 법안 중 다수는 사전에 이해관계 당사자들과의 충분한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 발생한다.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초 이·미용사, 조리사, 요양보호사, 사회복지사 등 9개 업종에서 정신질환자도 자격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 9개를 무더기로 발의했다가 2주 뒤 모두 철회했다. 9개 업종을 대상으로 같은 취지의 법안을 냈다가 이를 철회한 것이다.
이는 정신질환자 지원단체 관계자들이 모든 업종에서 정신질환자의 취업 제한을 다 풀어달라고 주장하면서 임 의원 측과 조율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 의원실 측은 “좋은 취지에서 발의한 것인데 관련 단체가 직업선택 규제를 완전히 없애달라고 요구했다. 점진적으로 가려는 우리 입장과 다른 면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따가운 여론의 시선 속에 철회한 사례도 있다.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은 대한민국의 헌정 발전에 공헌한 전현직 국회의원 중 일정 요건을 갖춘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도록 하는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 개정안을 냈다가 ‘도 넘은 특혜’라는 비판을 받았다. 김 의원은 결국 법안을 철회했다.
민형배 민주당 의원은 5·18민주화운동의 정의 조항만 추가한 법안 4건을 지난달 초 한꺼번에 발의했다가 일주일 뒤 철회했다. 이후 같은 내용의 법안 4건을 다시 발의했다. 최종 검토안이 아니라 자구 수정이 되기 전 법안을 국회 의안과에 제출했고, 이런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탓이다. 민 의원실 관계자는 “실무자 실수로 수정되기 전 법안을 올렸다”며 “전자발의시스템에선 수정이 되지 않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주거급여 지급 대상을 확대하는 내용의 주거급여법 개정안을 지난달 15일 대표 발의했는데, 사흘 뒤인 18일에 이를 철회했다. 심 의원실 측은 “간단한 오류가 있어 철회했다”며 “다음주 중 재발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입법권을 가진 의원들이 자신이 발의한 법안을 철회한다는 것은 그만큼 법안 발의를 신중하게 검토하지 못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반대 여론에 밀려 주변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를 돌파하기보다 쉽게 의지를 꺾은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 관계자는 “법안 철회는 통상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의했다가 오류가 뒤늦게 발견되거나, 혹은 발의 이후 이해당사자들이 강하게 반발하는 경우에 발생한다”며 “의원들의 법안 발의 건수를 중시하는 국회 풍토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1대 국회에선 의원입법으로 발의한 건수가 과거 국회에 비해 큰 폭으로 증가했다. 16대 국회에서 1651건이던 의원입법 발의 건수는 17대 국회 5728건, 18대 국회 1만1191건, 19대 국회 1만5444건으로 급증했다. 20대 국회에선 2만1594건으로 처음으로 2만 건을 넘어섰다. 7개월 남짓 경과한 21대 국회에서 의원입법 건수는 6594건에 달한다.
11일 현재 21대 국회에서 철회된 법안(58건)을 발의 의원 소속 정당으로 보면 민주당이 44건으로 75.6%를 차지했다. 이어 국민의힘 10건, 정의당 1건, 무소속은 3건이었다. 의원 개인별로 보면 임 의원이 철회 법안 9건으로 가장 많았고, 민 의원이 4건, 소병훈 의원이 3건으로 나타났다.
여론 의식, 기본권 침해 논란까지
충분한 법적 검토 없이 일부 지지층의 주장만을 반영하거나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해 국민 기본권을 제한하는 법안을 내놓는 사례도 있다. 여권에서는 부동산시장 대책과 관련해 엉뚱하게 처벌 중심의 입법을 추진하다 역풍을 맞기도 했다.신정훈 민주당 의원은 다주택 고위공직자가 60일 이내 주택을 매각하거나 부동산을 백지신탁하도록 하는 내용의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을 지난해 7월 발의했다. 이 법안에는 매각 대상자가 정당한 사유없이 이를 어길 경우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윤재갑 민주당 의원도 다주택 고위공직자를 겨냥해 1채 이상이 투기과열지구나 조정대상지역에 있으면 이를 처분토록 하고, 그렇지 않으면 승진과 임용 등 과정에서 인사 조치를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들 법안은 현재 해당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하지만 행안위 전문위원실은 검토보고서에서 “직무 관련성과 가족 구성원의 거주 목적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1주택 이외 주택을 처분토록 하는 것은 이해충돌 방지라는 입법 목적에 비해 기본권 제한의 범위가 과도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신 의원 안은 부동산 매각 후 감정평가액을 초과한 부분은 국고로 환수하도록 규정해 객관적 교환가치 측면에서 재산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우려했다.
입법권, 정쟁 스피커로 활용되기도
지난해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극심한 갈등이 확산되면서 국회에선 ‘윤석열 출마방지법’ ‘추미애 방지법’도 등장했다.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는 현직 검사와 법관이 공직선거 후보자로 출마하려면 1년 전 사직하도록 하는 검찰청법·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야권의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조사에서 선두주자로 떠오른 윤 총장이 오는 7월 임기가 끝나는 점을 감안해 2022년 3월 치러질 대선에 출마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야당도 지난해 말 윤 총장 징계를 주도한 추 장관을 겨냥해 ‘추미애 방지법’을 발의했다. 전주혜 국민의힘 의원은 법무부 장관이 특정 정당의 당적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전문가들은 의원의 입법권을 존중해야 하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된다면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국민의 관심은 받을 수 있겠지만 특정인을 겨냥한 입법이 실제로 입법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추 장관이나 윤 총장이 여론의 관심에서 사라지면 법안도 상임위에 상정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상진 김판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