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 "스포츠 교류는 남북간 갈등을 해소하는 최고의 효과적인 대화수단" 이다

입력 2021-01-09 07:58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이 2021년 신년을 맞아 "스포츠 교류는 남북간 갈등을 해소하는 최고의 효과적인 대화수단" 이며, "문화ㆍ관광 사업으로 연결 되는 경제 수단" 이다.는 주제로 담화를 발표했다.

《 남북 교류 - 민간 (지자체) 스포츠교류의 역활 》

스포츠 외교, "남북 민간 (지자체) 교류, 스포츠 교류 중심으로"

□ 순서

1. 남북 교류 -민간 (지자체) 스포츠 교류의 역활
2. 남북축구교류 역사 이야기
3. 남북체육교류의 중요성과 대통령 직속 남북체육교류의원회 필요성

1. 남북교류 -민간 (지자체) 스포츠 교류의 역활

1) 남북 스포츠교류의 역활

- 전 세계를 UN 회원국으로 하면 193개 국.
- 반면 FIFA 회원국으로 계산하면 현재 211개국.
- 대한민국 국제 위상은 FIFA나 UN 회원국들과 비교하면 매우 높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관련국(미국. 중국. 소런. 일본) 속에서는 그
위상이 매우 약하다
- 이유는 '비해화, 대북 제재 완화' 등의 정치적 환경은 남북이 한반도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구조적 환경이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스포츠교류는 올림픽 정신이고 유엔정신 이며, 대북제재 재나 한미관계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확대 할 수 있는 분야이다.
-하나의 민족, 두 개의 체제 속에서 스포츠교류의 확대는 남북 주민들의 동질감 회복과 스포츠 산업 발전의 원동력이며, 궁극적으로 복잡 미묘한
국제 정치 환경 속에서 남북이 남북관계의 상수가 될 수 있는 구심점이 될 수 있다.

2) 민간 (지자체) 스포츠교류의 역활

- 지금까지 우리 정부는 이러한 스포츠교류 마저도 정치적 환경의 변수로 생각하며 남북대화로 이어질 기회를 놓치고 있다.
- 여기서 필요한 것은 '민간교류' 인데, 남북의 정치적 ㆍ군사적 갈등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민간 스프츠교류 추진을 확대해야 한다.

☆ 정치적으로 중단시킨 남북 스포츠교류를 민간 교류로 이어간 사례

(1) 이명박 정부
- 2008년 7월, 금강산에서 우리 측 관광객 사망사건 발생 후 금강산 관광 중단 및 2009년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으로 남북지역에서
스포츠교류마저 중단.
- 하지만 민간교류를 통해 2006년 5월 평양에서 체결된 <남북체육교류계약서> 의 계약대로 2006년에서 2008년까지 평양에서 6번,
남한에서 4번 등 10번의 남북축구교류를 진행.
- 당시 이명박 정부가 대북 압박정챽으로 이러한 남북지역에서 민간 스프츠교류마저 불허했으나, 남북 축구교류를 국제로 조직해 중국에서 이어감.

* 북한 붕괴론에 바탕을 둔 대북 압박정책은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정부와 정권도 외부 압력으로 붕괴된 적도 없고 중국이 북한 붕괴를
방관 하지 않을 것이다.

(2) 박근혜 정부
- 지난 2016년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개성공단을 중단.
- 남북체육교류협회가 조직한 중국 쿤밍 남북친선교류경기도 중단.
- 이로 인해 남북체육교류협회는 친선교류 무산에 따른 행사 위약금, 국제교류로 추진해 참가했던 우즈벡, 중국 등 관련 단체의 대외 신뢰도
악화.
- 그러나 남북체육교류협회는 강원도 등의 지자체와 북한 4.25 체육단의 스포츠교류를 중국에서 꾸준히 추진했음.
- 이후 2017년 12월에는 다시 남ㆍ북ㆍ중이 참여하는 국제대회를 성사.

(3) 문재인 정부
- 2018년 9월, "9.19 평양 공동선언" 으로 "개성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 이후 한미워킹그룹 싸인으로 남북 정치적 갈등.
- 그러나 지난 2019년 1월 중국 쿤밍에서 추진하는 '서울시청 여자축구단과 북한 4.25여자축구단', " 익산시청 선발 남여 탁구단 북한
4.25 남여탁구단" 교류를 불허.
- 정부 행사로 추진했던 북한 공연단의 서울방문 및 북한 농구단의 서울경기는 이뤄지지 않음.
* 봄이온다 평양공연(남측공연단) 및 남한농구단의 평양 통일농구 교류 이후 정부간 합의하에 추진 됬으나, 남북 정치적 갈등으로 중단.
- 하지만 남북체육교류협회는 2018년, 아리스포츠컵 대회를 8월 평양에서 육로 방북경기 를 성공적으로 개최.
- 같은 해 10월에는 북한선수단이 육로로 방남하여 춘천에서 진행.
- 즉, 역사상 처음으로 '육로 상호방문교류' 성공
- 정치적으로 중단시킨 남북 스포츠교류를 민간 스포츠교류로 이어간 사례를 바탕으로, 정부가 추진하는 남북교류는 스포츠교류도 중단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 그러나 남북체육교류협회 같은 신뢰있는 민간단체가 추진하는 스포츠교류는 중단되지 않았다.
- 오히려 어려운 시기에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기에 민간 스포츠교류가 큰 역활을 했다.

2. 남북축구교류 역사이야기

"'민족의 혼을 잇다, 경평축구 대항전", "위기마다 평화를 잇다, 아리스포츠컵"

1) 경평축구 대항전

- 일제 강점기 시절 의병ㆍ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여운형 선생을 비롯한 조선 지도자들은 축구공을 왜놈이라 생각하고 차라 는 은밀한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축구를 통해 민족의 혼을 이었음.
* 여운형 : 1933년 경성축구단 창단 이사장, 1934년 조선축구협회 회장, 1945년 광복이후 초대 대한체육회 회장.
- 이어 조선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생활의 울분을 축구로 산화시키며 축구만큼은 일본을 이기며 조선의 자긍심을 키워 나감.
- 경성학생팀은 1928년 일본 국가대표 축구팀을 일본 총독이 보는 앞에서 5대0으로 이겼고, 평양 숭실학교는 일본 대학 챔피언 와세다
대학을 7대0으로 이김.
- 일본을 이길 때마다 밤을 새우며 축제 속에 민족의 울분을 풀었고, 한반도 축구 역사상 최초로 도시 대항전 '경평전' 이 탄생함.

2) 해방이후 경평전 (1946. 03. 25. 서울)
- 해방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 버린 경평축구는 남북축구 였음.
-1946년 3월 25일, 해방 이후 남북을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군정 통치를 하던 시기에 서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에서
제8회 경평축구대항전이 열림.
- 당시 남북 통행이 금지 되며 평양 선수들은 경비망을 둟고 어렵게 내려 왔으며, 돌아갈 때는 육로가 위험해 뱃길을 택해야만 했음.
- 그러나 평양 선수들은 돌아가면서 다음 해에 서울 선수들을 평양으로 꼭 초청하겠다는 약속했음.
- 이후 먼 훗날 '아리스포츠컵' 에서 지켜짐.

3) 최초의 한일전 도쿄대첩, '경평전' 정신으로 대파

- 6.25전쟁으로 인해 피페해진 상황 속에서 정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음.
- 1954 FIFA 스위스 월드컵 예선에서 한국과 일본의 맞대결로 아시아 지역 월드컵 본선 진출티켓을 결정했는데, 이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 경기를 불허하려고 함.
- 한국전쟁 이후라 국민들은 실의에 빠진 상태였고, 이런 상황에서 홈 경기에서 패배라도 한다면 설상가상이라 판단했기 때문.
- 또한 광복이 10년도 안된 상황에서 일본인을 입국시키는 것도 국민 정서상 용납할 수 없는 문제 였음.
- 그러나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 장택상 (광복이후초대외무부장관, 국무총리), 감독 이유형 등은 경무대 (청아대)를 찾이가 홈 경기를
포기하고 두 경기 모두 원정으로 치러도 상관없고, "패배 한다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 는 각서 등을 쓰며 대통령께 간청하여 승인 되었음.
- 선수들의 평균 연령은 36세의 노장들이었으나, 민간단체와 노력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대표팀은 최초의 한일전에서 일본팀을 5대1로 대파했음.
- 이들은 일본을 넘어 1954 스위스 월드컵 진출 했고 국민은 하나가 되는 등, 전쟁의 폐해 속에 희망을 쏘아 올렸음.

4) 1954 스위스 월드컵 본선 (아시아 최초 월드컵 본선 진출)

5) 북한 천리마 축구단 리찬명 골키퍼 (GK), 대한민국 양지 축구단 공격수 이회택 (FW)

- 1966 잉글랜드 월드컵의 우승후보 이탈리아를 1대0으로 꺽고 아시아 최고 월드컵 8강 진출, 북한 천리마 축구단.
- 이때 기록한 리찬명 골키퍼의 클린시트 기록은 아직까지 월드컵역사에서 깨지지 않는 전설이 됨.
- 아시아 축구에 대한 인식을 바꾼 천리마 축구단.
- 북한 천리마 축구단 활약으로 아시아 지역 월드컵 본선 진출티켓이 0.25장에서 1장으로 늘어남.
- 이에 북한 천리마 축구단의 월드컵 8강으로, 남한에서도 중앙정보부 (부장 김형욱) 소속 양지축구단을 창단하며 축구로 체제경쟁을 함.
* 양지축구단은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 중앙정보부 부훈에서 양지를 따와 지었다.
- 여기서 '경평전' 에 선수로 참가했던 김용식, 최정민 감독 등으로부터 축구 기술과 경평전의 정신을 이어 받은 이회택 선수는 아시아 최고
공격수로 인정 받음. 북한의 리찬명 골키퍼도 경평전에 참가했던 명려현 감독 등으로 부터 경평전의 정신을 이어 받았음.
- 같은 시대에 아시아 최고 공격수 황금다리 이회택 (1946년생/ 양지축구단 최연소), 세계 최고의 골키퍼 북한 리찬명 (1947넌생/
천리마축구단 최연소) 이 등장.

6) "운명적인 만남" 김경성과 북한의 리찬명, 남한의 이회택

- 2005년 김경성은 북한 수문장 리찬명과 남한 공격수 이회택을 운명적으로 만났음.
- 김경성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경평전' 이 남북축구 발전의 모태였다는 축구역사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경평전 부활을 위해
경평축구대항전을 재개 하기 위해 노력함.
- 마침내 2006년 5월 남북 역사상 최초로 '경평전' 교류와 같은 <남북체육교류계약서> 를 체결 하고 아리스포츠컵을 탄생 시킴.
- 지금까지 22번의 남북축구 정기교류전을 정착 시키면서 <아리스포츠컵 국제유소년축구대회> 도 탄생시켰음.
- 2019년 9월 국제스포츠 평화상을 수상하기위해 우크라이나 오데사를 방문했던 김경성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과 예선 경기에
참가했던 당시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 공격수 발레리 포쿠잔으로 부터 1966 천리마축구단 리찬명 골키퍼 활약을 다시한번 확인 하였음.

7) 위기마다 평화를 잇다, 아리스포츠컵
(아리스포츠컵 '남북유소년축구교류' 22회 추진 경과)

☆ 남북 상호 방문 원칙 수립, 스포츠 데탕트 (긴장완화) 정책 수립, 매년 공동 훈련 및 친선 경기 추진, 국제 대회 단일팀 구성 출전 등

○ 2006년 5월 : '남북체육교류계약서 체결' (남북체육교류협회/ 북한 4.25체육단)
- 남북 교류 역사상 최초로 정기교류 목적으로 체결, 우리 정부 (통일부) 승인 이후 22회 남북 축구 교류 성사.

○ 2006년 ~08년 : "남북 상호 방문 교류 정기전" 으로 정착
- 남한 유소년축구팀 매년 2회씩 3년간 6회 평양 방북 교류 및 북한 4.25유소년팀 3년간 4회방남 교류 등 총 10회 성사, 매년 중국
쿤밍에서 북한선수단 훈련지원.
* 2007년 3월, 한미연합 훈련기간중 북한청소년축구팀 1개월 전지훈련 목적으로 방남하여 전국 (제주, 광양,수원,서울,일산 등) 투어
교류 추진
* 2007년 5월 김경성 이사장 17세 월드컵 북한 대표로 참석하여 조추첨
* 2007년 8월 김경성 이사장 북한 공동 단장 자격으로 "2007 FIFA 청소년 (U17)월드컵" 참가, 북한 16강 진출

○ 2009~ 14년 : MB 정부, 남북지역에서의 스포츠교류 불허로 중국에서 국제대회 추진.
- 경기도 후원, 국제유소년축구대회 3회 추진.
- 인천시 후원, 인천 평화컵 국제유소년축구대회 4회 추진.
* 인천아시안게임에 북한팀 참여에 기여

○ 2014년 ~현재 : 아리스포츠컵 국제유소년축구대회로 추진, "남북 상호 방문 교류 원칙" 수립 , 스포츠 데탕트 (긴장완화) 정책 수립.
- 2014년 11월 : 제1회 경기도 연천 대회
* 대회 개최지 연천에서 3주전 대북전단지 살포에 의한 남북 포격전 발생

- 2015년 8월 : 제2회 평양 대회
* 목함지뢰 사건 및 대북확성기 문제로 남북포격전으로 일촉즉발의 군사적 위기 상황발생 -> 남북 고위급 회담 타결과 이산가족상봉행사로 연결

- 2017년12월 : 제3회 중국 쿤밍 대회
* 남북 직통선 차단, 북한의 핵실험, ICBM 발사 등 전쟁 위기 상황 발생 -> 2018평창올림픽에 북한선수단 등을 참여에 기여

- 2018년 8 ~ 10월 : 제4회 평양, 제5회 춘천 대회 "상호 육로 방문 교류" 성사.
* 남북 교류 역사상 최초로 교류목적으로 서해선 육로로 남한선수단이 평양 방문, 북한 선수단이 서해선 육로로 춘천을 오는 "육로
상호방문교류시대"를 개척 -> 2021년 북 강원도 원산에서 개최 하기로 합의.

3. 남북체육교류의 중요성과 대통령 직속 남북체육교류의원회 필요성.

1) 낭북체육교류의 중요성과 대통령 직속 남북체육교류의원회 필요성

(1) 남북체육교류의 중요성
- 남북체육교류는 남북간 이념적 갈등과 유엔제재의 틀 극복 가능
- 현재의 남북 경색 국면을 타개할 수 있는 최상의 카드로 활용 가능
- 북한의 입장에서 수용 가능성이 가장 높음

(2) 남북스포츠교류 ('아리스포츠컵') 의 교훈
- 2014년 10월, 대북 전단지 살포에 의한 남북포격전 발생 직후인 2014년 11월, 경기도 연천에서 남북축구교류전 ('아리스포츠컵')
성사
- 2005년 8월, 경기도 접경지 에서 목함지뢰 폭파사건 및 대북확성기 문제로 남북포격전으로 일촉즉발의 군사적 위기 상황속에서도 평양에서
남북축구교류전 ('아리스포츠컵') 성사
- 2017년 12월, 중국 쿤밍에서 남북축구교류전 성사직후,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에 남북단일팀 및 북한응원단 방남 성사
-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 김경성) 가 주관하는 '아리스포츠컵' 은 지난 15년간 총 22회의 남북체육교류를 성사

(3) 남북체육교류위원회 신설 필요
- 남북간 동등한 격의 체육교류 대화 통로 필요
- 북한은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총리급) 가 체육을 총괄하고 있으며 그 휘하에 내각 소속의 체육성 (장관급) 이 실무 담당
- 남한은 문체부 (장관) 의 제2차관 휘하에 체육국에서 실무를 담당

(4) 남북체육교류의원회 규모 및 역활
- 대통령 직속 '남북체육교류의원회' 신설, 위원장은 총리급 (예 : 2024년 강원도 청소년 동계올림픽 공동 개최 역활)
- 상근조직 (국단위 규모) 및 비상근 특보 신설
- 정치ㆍ군사ㆍ이념에 구애 받지 않는 순수 스포츠교류 형식으로 추진
- 남북간 매년 "상ㆍ하반기 상호방문 형식"으로 추진함
- 이는 응원단은 자연스럽게 북한관광으로 연결함으로써 대북제재를 극복할 수 있음

2) 남북체육교류 지원 사례와 미래 계획

(1)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스포츠 약소국 지원 사례
- 2014 인천 아시안게임을 개최 했던 인천광역시는 "비젼 2014 지원 프로그램 (아시아 스포츠 약소국가 지원 프로그램)" 예산을 제2
시금고인 농협은행을 통해 2,000만딸라 재원을 마련하여 OCA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 에 지정 기부 함.
- OCA 사업으로 "비젼 2014 지원 프로그램" 단체로 지원금을 사용하게 함
- 이에 인천광역시는 30개 아시아 지역 스포츠 약소국가 (북한포함) 지원을 성공적으로 추진 함

(2) 제 6회 2021 북 원산 아리스포츠컵 국제유소년축구대회 계획
- 개최 장소는 북 강원도 원산
- 개최 시기는 2021년 5월이나 코로나 19 상황에 따라 시기 조정 가능
- 참가대상은 남북 각 4개팀 총 8개팀 (U15유소년) 임. 이는 국제 대회 성격이나, 금년 대회는 코로나19 영향으로 '남북교류전'으로
추진
- 주관ㆍ주최는 남북체육교류협회와 북 4.25체육단 공동 조직위

(3) 2024 강원도 청소년 동계올림픽 동계 스포츠 약소국 지원 프로그램 평창ㆍ마식령 공동 개최 계획
- 스포츠를 매개로 전 세계 국가와의 우호협력 관계를 강화
- 국제무대에서의 대한민국의 영향력을 한 단계 넓힐 수 있는 기회 마련
- 남 강원도 평창과 마식령에서 전 세계 청소년 동계 스포츠 약소국가 훈련 지원 프로그램으로 양측을 오가는 땅 길,하늘 길,바닷 길을 개척
- 북 강원도 마식령에서 훈련지원을 실시하여 북한 지원사업과 함께 남북 관계 개선
- 북한 금강산,원산 관광 사업지원으로 연결 될 수 있음- 이는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스포츠 약소국 지원 사례들 통해 대북제재를 극복할
수 있는 관광 사업으로 추진이 가능함을 알 수 있음

※ 독일 통일 사례 참고

□ 독일의 통일은 서독의 동방정책이 일관성 있게 추진 되어서 가능 했다

- 1949년 서독 정부 수립 이후 콘라트 아데나워 정부는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서방 정책'을 추진 하였고 프랑스와 화해 하면서 성공
했지만, 동서독 간의 단절과 베를린 장벽이 구축 (1961.8) 되고 주민들의 고통과 불만을 고조시켰다
- 1963년 서독의 에곤 바 (Egon Bahr) 의 접근을 통한 변화의 '동방 정책'이 추진
- 동방정책은 "데탕트 (긴장완화)" 정책이며, 동독 체제를 인정하고 동독 지도부에 많은 것을 양보하고 동독정권을 안정화시켜 주면서 서독의
수출을 동독,체코,폴란드 등으로 확대시키고 동독 주민들의 개방과 변화를 끌어내는 정책 임.
- 서독의 동방정책의 성공은 "정권의 변화와 관계없이 일관성있게 추진"
- 이는 우리도 "6.15 공동선언 같은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 나가야 하는 점을 시사.
- 이와같은 일관성 있는 교류를 지속적으로, 실천 가능한 분야는 '남북 스포츠교류'이며 "아리스포츠컵" 같은 정기교류 임.

* "통일은 생각하되 말하지 말라", "큰 담론보다 작은 실천이 중요하다", "스포츠 교류는 남북간 갈등을 해소하는 최고의 효과적인
대화수단" 이며, "문화ㆍ관광 사업으로 연결 되는 경제 수단" 이다.
* 우리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기운은 베이징과 워싱턴에 가있는 실정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남북)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우리(남북)가
주도적으로, 일관적이고 정기적이면서 실천 가능한 교류(스포츠)를 지속해야 함.
* 동방정책을 설계한 '에곤 바'는 "독일의 통일은 모스코바에서 시작된다" 고 했다.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귄은 경제 위기로 신사고 외교를
하면서 "이제부터 우리가 동유럽 문제를 간섭하지 않는다" 라고 선언하면서 체코와 폴란드에서의 시민혁명이 가능했고 이런 개혁과 시민혁명 바람이
동독으로 불어 들어가 동독의 시민 혁명을 일으켜 독일 통일이 이루어 졌다.

강민석 선임기자 kang196021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