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시대, 경마장 밖에서 무너지는 ‘인생’과 ‘마생’

입력 2021-01-08 06:00 수정 2021-01-12 17:56
한 말 관리사가 6일 오전 경기도 과천의 서울경마공원에서 경주마 한 마리를 끌고 새벽 조교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마사회 제공

지난달 19일 서울 과천의 렛츠런파크. 14마리 경주마들이 영하의 날씨를 뚫고 좁은 철제 출발대 앞에서 서성였다. 형형색색의 복색을 갖춘 기수들은 여느 때와 같이 버둥대는 말을 능숙하게 다독이며 출발선에 섰다. “탁!” 신호와 함께 게이트가 열리자 총알같이 튀어 나가는 경주마들 뒤로 뿌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기수들은 머리를 한껏 낮추고 엉덩이를 높여 충격을 흡수했고, 말들은 힘차게 발을 굴렀다. 김용근(38) 기수의 3세마(태어난지 만 4년 된 말) 블루케이가 베테랑 박태종(55) 기수의 4세마 스피드흑룡을 4마신(馬身) 차로 따돌리고 결승선을 통과한 가운데, 문성혁(25) 기수의 3세마 열린문이 스퍼트를 올려 머리 차 3위로 골인했다. 숨을 헐떡이는 말들의 털 위로 겨울 햇살이 반짝반짝 빛났다.

기수와 말들은 내달렸지만, 이날 경마장 풍경은 평소와 달랐다. 코로나19 시대, 관중이 한 명도 없는 황량한 경마장엔 말 발굽소리와 장내 아나운서의 중계음만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배당이 이뤄지지 않아 베팅 정보를 표시하는 화면엔 ‘9999.9’, ‘0원(₩)’ 같은 무의미한 숫자들만 가득했다. 이현종(27) 기수는 “평소엔 예시장(말들을 미리 선보이는 곳), 관람대에서 수만 관중들이 함성을 보내주셔서 힘이 더 났다”며 “지금은 아무래도 어색하고 불편한 게 사실”이라고 했다.


지난달 19일 경기도 과천 서울경마공원의 경마장 관람대 안쪽에 위치한 베팅 정보 표시 화면. ‘무고객 경마’가 진행돼 화면엔 무의미한 숫자들만 표시돼 있다(위). 같은 날 진행된 경기 중 관중석이 텅 비어있다(아래). 과천=이동환 기자

한국마사회는 지난해 6월부터 ‘무고객 경마’를 진행하고 있다. 수입은 없지만 매주 약 70억원의 상금을 지급한다. 기수-조교사-말관리사 등 ‘경마장 안’ 사람들의 삶 뿐 아니라 생산농가-경마정보지 업체 등 기반산업 종사자, 나아가 초과공급 상태인 경주마 등 ‘경마장 밖’ 주체들의 삶까지 지탱하기 위해서다. 현행법 상 경마장과 장외발매소에서만 마권을 발매할 수 있는데, 코로나19로 관중을 받을 수 없어 낸 고육지책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고 있다.

이에 다른 스포츠처럼 비대면으로 즐길 수 있도록 ‘온라인 마권’을 도입하잔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사회 각계의 비판에 논의도 힘든 상태다. 지난해 발의된 마사회법 개정안 4건이 모두 계류되고 있을 정도. 하지만 ‘사행성’ 논쟁에 앞서 들여다봐야 하는 건 경마 산업을 둘러싼 사람, 그리고 말들의 삶이다. 그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어서다.

‘경마장 밖’ 사람과 말들의 삶
경주마 생산업에 종사하는 이광림씨가 지난해 가을 제주도에 있는 목장 안 마방에서 경주마 한 마리를 끌고 방목장으로 나가고 있다. 이광림씨 제공

“식용으로 길러지는 다른 축종과는 달리, 경주마는 퇴역 후 모마(母馬)나 승용마로 다시 태어난 목장에 돌아오기도 해요. 애착이 더할 수밖에 없죠.”

이광림(44)씨는 제주도에서 경주마를 생산한다. 빈마(牝馬·암말)를 들여와 새끼를 치면 이를 키워 마주들에게 납품하는 일이다. 수입된 빈마가 잉태해 낳은 새끼가 2세마로 성장할 때까진 약 5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하다. 문제는 경주마가 2세 때까지만 경마장에 등록될 수 있단 것이다. 경마가 열리지 않으면 수요가 줄어들어 팔리지 않은 2세마가 생긴다. 그렇게 3세가 된 경주마는 존재가치를 잃는다. 승마 체험에 활용되는 승용마의 경우 보통 경주마에서 퇴역한 퇴역마들로 충당돼 3세마가 갈 자리는 없다. 도산 위기에 처한 목장의 말들이 3세 이상이 될 경우 식용으로 팔리거나 도축될 수도 있는 이유다. “한 마리당 1년에 840만원씩 들어요.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정말 도산할지도 몰라요. 말들을 굶길 순 없는데….”

마사회는 올해 상반기까지 지난해 기준 2세마를 경마장에 등록할 수 있도록 연장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다. 당장 지난해 기준 1세마가 추가로 시장에 나왔다. 경마가 열리지 않으면 이 말들과, 말들을 키운 목장들이 차례로 무너진다. 2019년 말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약 2만3000명이 말산업에 종사한다. 말사육업 사업체는 678개소에 달한다.

지난달 19일 코로나19 여파로 아예 셔터를 내려버린 서울 지하철 4호선 경마공원역사 내 경마정보지 업체 부스의 모습. 과천=이동환 기자

“수입이 ‘0’이에요. 택시 운전이나 일용직을 하면서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애널리스트 분들이 많죠.”

이동욱(60·예명 이성운)씨는 20년 전 경마 애널리스트로 데뷔했다. 경마장에서 매일 새벽 조교(훈련)에 나선 경주마 약 500두를 관찰하고, 주말 경기들을 분석해 경마정보지에 싣는 일이다. 관중들이 이씨에게 따로 ARS나 문자메시지로 연락해 정보를 구매하기도 한다. 적중률에 따라 인기도도, 수입도 천차만별이다. 축적한 돈이 없는 대부분의 비인기 애널리스트들은 코로나19로 생계 위기에 몰렸다. 마사회에 등록된 경마정보지 관련 업체 수는 330여개, 지난해 손실 총액은 305억원으로 추정된다.

“요새 경마 마니아 분들이 불법 사이트를 통해 해외 경마에 돈을 걸어요. 돈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거죠.” 이씨처럼 직업을 잃은 경마 종사자들은 최근 피켓 시위까지 벌였다. 합법 경마가 멈춘 사이 ‘불법경마’란 암시장이 커지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어서라고 했다.

실제로 마사회 매출이 지난해 1조890억원으로 전년대비 6조2682억원 감소한 반면 불법경마의 몸집은 커졌다. 지난해 불법경마 사이트 신고건수는 2615건으로 전년대비 92.3% 증가했고, 폐쇄건수(7149건)도 32.2% 늘어났다. 불법 경마의 시장 규모는 2018년 6.3조원, 2019년엔 최대 13조9339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생(生)의 관점에서...
6일 오전 경기도 과천의 서울경마공원에서 새벽조교가 끝난 뒤 경주마를 끌고 들어가는 말 관리사들의 모습. 한국마사회 제공

우리 사회엔 ‘경마는 도박’이란 인식이 짙게 깔려 있다. 그동안 경마 산업의 행위자들이 도박 중독 등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부작용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코로나19가 경마를 뒷받침하는, 선의의 기반산업 종사자들과 말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단 사실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들에겐 죄가 없다.

아시아 경마 선진국 홍콩은 코로나19 기간 온라인 경마 비중을 70%에서 90%로 늘렸고, 비중이 70.5%인 일본의 경우 같은 기간 무관중 경마를 진행하면서도 전년대비 매출이 3% 상승한 걸로 추정된다. 강기두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는 “마권 구매 시 인증을 강화하고 구매 상한선을 철저히 준수하게 하는 등 신뢰도 높은 시스템을 개발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인다면, 명의도용·과몰입 등 온라인화의 부작용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며 “경마가 말 산업 전반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어마어마하게 크기에 건설적인 온라인 마권 도입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조언했다.

과천=이동환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