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바쳐 투쟁한 충남의 ‘숨은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이 100년이 지나서야 빛을 보게 됐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충남의 숨은 독립운동가 발굴 연구사업’을 통해 홍주의병 돌격장 남규진(南奎振) 선생 등 독립운동가 346명을 찾았다고 5일 밝혔다.
과거 직계 자손만 가능했던 독립유공자 신청은 자손이 없을 경우 신청이 불가능하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지난해 서훈 신청 조건이 완화되며 일제 시대 단 하루라도 수형 기록이 있으면 지자체장 명의로 서훈 신청을 할 수 있게 됐다.
도 역사문화연구원은 알려지지 않은 지역의 독립운동가에게 서훈을 추서하기 위해 지난해 연구사업을 추진했다.
그 결과 예산·서천·부여 등 3개 군에서 미서훈 독립운동가 346명을 찾아냈다.
지역별로는 예산군에서 140명을 발굴, 87명에 대한 공적조서를 작성했다. 제적등본이 확인된 40명은 서훈까지 신청했으며 최종 30명이 심사 대상에 올랐다.
163명을 찾은 부여군에서는 92명, 서천군은 43명 중 21명에 대해 공적조서 작성을 마쳤다. 이들 두 지역의 미서훈 독립유공자의 서훈은 조만간 신청할 예정이다.
이번에 확인된 남규진 선생의 경우 고종실록과 면암집, 의병장 문석환의 ‘마도일기’, 의병장 민종식·곽한일·신보균 등의 공훈록, 국사편찬위원회와 등을 통해 공훈이 확인됐다.
충남 예산군 예산읍 창리 출신인 그는 43세였던 1906년 2월 의병장 곽한일과 함께 면암 최익현을 찾아갔다.
당시 면암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발하며 전북 태인에서 거병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남규진과 곽한일에게 “호서(충청)에서 군사를 일으켜 영호남과 함께 ‘기각(掎角)’의 형세를 만들자”고 했다.
이에 남규진과 곽한일 등은 같은 해 5월 29일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던 홍주성에 진군해 홍주의병에 합류한다.
홍주의병은 그러나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일제에 붙잡힌 남규진은 무기징역형을 받는다.
다른 홍주의병과 함께 대마도에 구금된 남규진은 뒤늦게 대마도로 압송된 면암과 함께 단식투쟁을 벌였다.
정부는 면암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민종식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곽한일·이식·유준근·안항식·신보균·문석환 등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반면 남규진은 서훈을 받지 못하며 잊혀졌다.
박병희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은 “연구사업을 충남 전역으로 확대해 독립운동가를 빛내고 선양하는 충남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홍성=전희진 기자 heej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