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에미리트(UAE)로 향하던 한국 국적 유조선 ‘한국케미’가 이란 혁명수비대에 나포되던 순간이 포착됐다.
이란 국영방송 IRIB는 4일(현지시간) 나포 당시 해상 위 헬기에서 촬영된 짧은 영상을 공개했다. 여기에는 이동하는 한국 선박에 따라붙은 혁명수비대 고속정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란 군인들이 갑판 위에 올라와 선원 전원을 집결시키기 직전 상황으로 보인다.
한국케미가 나포되기 전 부산에 있는 선박 관리회사에는 위성 전화 한 통이 울렸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한국케미 선장이 회사 임원에게 실시간 선박 운항 상황을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회사에 따르면 당시 선박 위치는 UAE와 이란 사이 중간에 있는 공해상이었다.
결국 한국케미에 접근해 갑판 위까지 올라온 이란 군인들은 선원 전원을 불러 모은 뒤 선장에게 “항구에 가서 조사해야 한다”며 운항 방향을 이란 쪽으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선장은 “이곳은 공해상이며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이후부터 선장의 위성 전화는 끊어졌다.
회사 관계자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화물을 싣고 정상적인 항로를 따라 운항하던 선박에서 근무하던 선원들과 카카오톡 등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이란 혁명수비대에서 갑자기 조사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한 시간도 안 돼 모든 선원과의 연락이 두절됐다”고 밝혔다. 회사 측은 선원들이 가지고 있던 휴대전화도 모두 이란 군인의 손에 넘어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케미의 나포 순간은 배에 설치된 CCTV 영상에서도 볼 수 있다. 혁명수비대가 고속정을 타고 선박으로 접근하는 장면과 나포 이후 이란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장면이 모두 찍혔다. 덕분에 한국에서도 선박 내부의 상황이 확인 가능했으나 이날 오후 9시쯤부터 화면 전체가 꺼져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 반관영 파르스통신은 이날 “혁명수비대가 걸프해역에서 한국 선박을 나포해 항구로 이동시켰다”며 “이 유조선에는 한국 국기가 달려 있었고 기름 오염과 환경 위험을 이유로 나포됐다”고 보도했다. 이어 “나포된 선원은 한국·인도네시아·베트남·미얀마 국적이며 이란 남부 항구 도시인 반다르아바스에 구금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케미 선사 관계자는 “배는 이중 선체 구조로 화물이나 연료가 해상으로 유출돼 오염시킬 수 없다”며 “위성 위치추적 시스템으로 실시간 배 위치를 확인한 결과 영해 침범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고 현재 배는 이란 항구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출범을 앞둔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국과 이란 사이 최대 현안은 한국 측 은행 2곳에 동결된 이란의 원유 수출대금이다. 70억 달러(7조6000억원) 규모로 알려진 이 자금은 이란중앙은행 명의로 한국 내 은행에 개설된 원화 계좌에 예치돼 있다.
이 계좌는 미국의 대이란 제재를 우회하면서도 양국의 물품 거래를 위해 미 정부 용인하에 거래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2018년 미국이 핵합의를 탈퇴하고 대이란 제재를 복원해 이란중앙은행을 제재 명단에 올리면서 거래는 중단됐다. 위반에 따른 불이익을 우려한 한국 내 은행이 이 계좌를 통한 양국 기업의 상품 거래 결제를 거부했고 그에 따라 이 자금은 사실상 동결됐다.
외화난이 심각해진 이란 정부는 한국에 자금 반환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한국 정부도 미 정부에 인도적 물품 거래에 이 동결 자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예외 인정을 꾸준히 요청했으나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 문제로 한국과 이란 관계가 악화하는 동안 핵합의 부활을 공약한 바이든 후보가 미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외교적 환경에 변수가 생겼다는 게 일부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거부하는 이란이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움직여 달라’는 취지의 신호를 보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5일 이 같은 해석에 대해 “지금 그런 것을 섣불리 이야기할 상황은 아니다”며 “일단 사실관계를 먼저 파악하고 우리 선원의 안전을 확인하는 게 급선무”라고 밝혔다. 또 “조속히 나포 상태가 풀릴 수 있도록 외교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며 “어제 1차 대응을 했고 주한 이란공관과 주이란 한국대사관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덧붙였다.
문지연 기자 jy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