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7년 전으로 시계바늘이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앞세워 과반을 차지한 한나라당은 그해 말 대선에서 가뿐히 승리를 거둔다. 2013년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은 4월 채동욱 검찰총장을 임명한다. 그리고 채동욱호가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을 수사하자 사퇴를 압박했고, 채 총장은 혼외자 문제를 이유로 6개월 만에 옷을 벗었다.
2020년 상황은 그대로인데 진영이 뒤바뀌었다.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180석이란 기록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문재인정부 청와대 출신을 비롯, 친문 인사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했다. 그리고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자진 사퇴 압박이 시작됐다. 2018년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과 조국 전 법무부장관 수사, 월성 1호기 문건 삭제 사건 등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한 뒤다.
친박은 친문으로, 채동욱은 윤석열로 바뀌었지만 정권을 겨냥한 수사에 반발한 정권 차원의 압력이란 로직은 같다. 다른 점은 친문은 친박에 비해 더욱 집요해졌고, 윤 총장은 채 전 총장에 비해 훨씬 거칠다는 점이다. 윤 총장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던 여론은 추미애 법무부장관 등장 이후 급반전하며 윤 총장은 거물 대선 주자급으로 외형을 형성했다.
누구도 이 갈등구조의 끝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섣불리 예측은 힘들지만, 사태의 총체적 책임은 인사권자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리고 당대표이지만 대선주자인 이낙연 민주당 대표의 역량이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다. 그가 문자메시지 수천 통을 쏟아내고 있는 친문 강성지지층을 좇아 윤 총장 탄핵에 나설지, 아니면 마이웨이를 선언할지에 당안팎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집요해진 친문
MB정권이 레임덕에 빠지면서 민주당은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의 사퇴로 열린 재보선에서 서울시장 빅 매치에서 승리한다. 위기에 몰린 한나라당은 박 전 대통령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내세우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꿔 총선에서 과반인 152석을 꿰찬다. 2012년말 대선에서 박 전 대통령이 가뿐히 승리했고, 혁신을 꾀하던 박근혜정부는 2013년 사상 첫 외부인사로 구성된 검찰총장후보추천위를 통해 채 전 총장을 임명한다.
채 전 총장이 정권 눈밖에 난 것은 국정원 댓글수사를 시작하면서다. 서울중앙지검에 특별수사팀을 만들어 MB정권과 박근혜정부 실세들을 향한 수사에 나선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대표적 사례였다. 수사팀은 원 전 원장을 국정원법은 물론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까지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려했다. 황교안 법무부장관이 반대하자 채 전 총장이 힘으로 버티는 사이 구속영장은 포기하되 선거법 위반 혐의 기소는 관철시켰다. 이때 수사팀장이 윤 총장이었다. 채 전 총장 취임 6개월만인 그해 9월 혼외자 보도가 터져나온다. 황 장관은 곧바로 채 전 총장에 대한 감찰에 착수했고, 채 전 총장은 결국 자진사퇴했다.
황교안을 추미애로, 채동욱을 윤석열로 바꾸면 2020년의 상황이 된다. 윤 총장은 21대 총선 전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을 시작으로 조 전 장관 수사, 월성 1호기 문건 삭제 수사에 잇달아 착수했다. “뼛속까지 검사”라고 칭찬하던 정권은 어느새 윤 총장을 ‘정치 검사’로 규정하고 사퇴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방법은 더욱 집요해졌다. 사생활을 건드리지 않는 대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총동원됐다. 윤 총장 친인척 사건과 채널A사건, 라임 로비 의혹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에 대해선 법무부장관의 수사 지휘권이 발동됐다. 윤 총장에 대한 무더기감찰도 뒤를 이었다. 직무정지, 정직 2개월 처분 등 행정력을 동원한 조치도 잇달았다. 이들 조치가 법원에서 집행정지 처분을 받기 전까지 추 장관은 윤 총장을 집요하게 몰아붙였다. 불과 7년전 그를 ‘의인’ 검사로 존중했던 민주당은 이를 악물고 그를 악인으로 만들려했다. 법원에서 행정 처분이 올스톱되자 민주당은 이제 검찰에서 수사권을 완전히 앗아오는 내용의 개정안을 준비 중이다. 검찰청을 해산하고 공소청을 만드는 법안까지 제출됐다.
문제는 일련의 작업들이 검찰 개혁의 명분을 단단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윤석열 몰아내기로 비춰지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이 문 대통령이 임명한지 불과 1년만에 윤 총장의 사퇴를 압박하고 나선 것은 그 이유가 없진 않다.
거칠었던 윤석열
윤 총장에 대한 의심이 공식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에 대한 수사였다. 검찰은 공소장에 문재인 대통령의 이름을 직접 15회를 적시했는데, 청와대는 여기에서부터 노기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조 전 장관은 “검찰 수뇌부는 총선에서 집권 여당 패배를 예상하면서 검찰 조직이 나아갈 총 노선을 재설정한 것으로 안다”며 “문 대통령 이름을 15회나 적어넣은 울산 사건 공소장도 그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집권 여당의 총선 패배 후 대통령 탄핵을 위한 밑자락을 깐 것”이라고 강조했다.
단순 피의자의 주장으로 보기에는 조 전 장관이 가진 위치가 가볍지 않다. 당시 검찰을 관할했던 민정수석이자 전 법무부 장관의 주장을 허무맹랑한 얘기로만 보기도 어렵다. 실제 청와대와 여권에선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한병도 전 정무수석,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 등 청와대 요직 인사들을 줄줄이 소환조사한 검찰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한 여권 관계자는 “정권 말도 아니고 집권 3년차에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포토라인에 서게 만든 검찰 처사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검찰 개혁 조치에 대한 검찰의 분풀이 수사”라고 비난했다.
여권이 이처럼 판단하는 것은 정무적 판단이 없는 검찰의 수사 과정 탓이다. 조 전 장관 수사의 경우도 한 예다. 지난해 8월 27일 여야가 조 전 장관의 인사청문회 일정에 합의하자 28일 검찰은 조 전 장관과 관련된 20여곳을 동시다발적으로 압수수색했다. 훗날 드러난 얘기들을 가지고 복기해보면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윤 총장과 독대해 조 전 장관 사퇴 얘기 등을 주고 받은 시점이다. 딸 입시 비리 여부 등과는 별개로 조 전 장관은 문재인정부 초대 민정수석으로서 검찰 개혁 작업의 밑그림을 그리고 시행한 사람이다. 박 장관을 만난 윤 총장이 “조 전 장관이 사퇴한다면 조용히 처리할만한 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점 등을 감안하면 여권 입장에선 윤 총장이 조 전 장관 비토에 나섰다고 판단할만한 지점이 있는 셈이다.
특히 조 전 장관 인사청문회 당일 부인인 정경심 교수를 표창장 위조 혐의로 전격 기소한 것도 이런 의심을 부채질했다. 아무리 공소시효 만료 직전이어서 그렇다고 하더라고 어떻게 청문회 당일 부인을 기소할 수 있느냐는 분노가 여권에서 폭발했다. 얼마든지 기술적, 정무적으로 피해갈 수 있었다는 게 여권의 생각이었다. 민주당 관계자는 “윤 총장은 법대로 했다고 하지만 그가 수사단계마다 보였던 결정을 보면 합리적인 수순 없이 철저하게 정권 수뇌부만을 상대로 기획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것”이라며 “입법부의 권한 아래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험대 오른 이낙연
문재인 대통령이 추‧윤 갈등에 사과했음에도 민주당 강성지지층은 윤 총장에 대한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민주당 주요 의원들에게는 며칠새 수천 통의 문자메시지가 쏟아지고 있다. 김두관 의원은 물론 주요 친문 의원들이 윤 총장 사퇴를 입에 담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표가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 이 대표는 단순 당대표가 아니라 대선주자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국민경선 또는 국민참여경선으로 일반 국민 참여가 최대 50%까지 반영된다. 당내 선거 중 가장 규모가 큰 오픈 프라이머리다. 경쟁자인 이재명 경기지사는 추‧윤 갈등에서 한발 벗어나 기본소득 등 실사구시 전략을 내세울 수 있지만 당을 이끄는 이 대표는 입장이 다르다. 이 대표가 강성 지지층에 끌려다닐 경우 중도층으로부터 외면받겠지만, 어설픈 중도노선을 탄다면 지지층이 그를 버릴 것이다. 그동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등 개혁 입법 과정에서 지지층 여론을 충실히 따랐던 이 대표가 독자 노선을 나설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이 대표는 28일 당 최고위원회에서 “다양한 의견을 검찰개혁특위 안에 녹여 지혜롭게 조정하고 당이 책임있게 결정할 것”이라며 “의원들도 넓은 시야로 보고, 책임있게 생각해달라”고 말했다. 탄핵 요구를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에둘러 반대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윤 총장 개인에 대한 탄핵보다는 검찰개혁TF를 통한 제도적 개혁에 중점을 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29일 열린 의원총회에서도 탄핵 문제를 두고 토론이 있었다. 일부 친문 의원들이 탄핵을 요구했지만 탄핵 대신 제도 개혁에 매진해야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다고 한다. 신동근 최고위원이나 이학영 의원 등 지도부와 중진들이 주로 이같은 의견을 밝혔다. 이 대표도 직접 발언을 하진 않았으나 지도부 차원에서 탄핵얘기를 꺼내는 건 부적절하다고 마무리지었다. 한 이 대표의 측근은 “개혁 입법의 경우 당 지지층의 요구는 물론 시대적으로도 서둘러 마무리해야한다는 당위성이 있었다”며 “윤 총장 탄핵 문제에 대해서는 이 대표가 교통정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