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대유행 속에서 세계인들은 아무리 부유한 나라라도 전염병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바이러스를 경시하고, 과학계의 경고를 무시하고,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지 못한 나라들은 강대국이라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백신으로 전염병을 통제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지금 ‘돈의 힘’은 나타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어느 나라가 먼저 백신을 맞는지가 세계적인 불평등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사람들이 백신을 가장 빨리 접종할 수 있는 방법은 큰 위험을 부담하고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것뿐”이라고 2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프리카에서 팬데믹의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이날 기준 남아공의 누적 확진자 수는 101만1871명, 누적 사망자 수는 2만7071명이다. 남아공에선 몇 달 후면 매일 100만회분의 코로나19 백신이 생산될 전망이다. 다만 이 백신들은 유럽을 비롯해 발빠르게 백신을 주문한 국가들로 보내진다.
NYT는 “국민들이 코로나19 백신의 임상시험에 참가하고 제조에 나서지만 남아공에서 최소한 내년 중반은 돼야 백신 접종이 개시될 것”이라면서 “그 때쯤 미국, 영국, 캐나다는 이미 1억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백신을 접종했을지 모른다”고 전했다.
글로벌기업 존슨앤드존슨의 코로나19 백신 임상시험에 참여한 42세의 요하네스버그 시민은 “권력 있는 사람들은 백신을 맞겠지만 나같은 사람은 2025년은 돼야 백신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게 내가 임상시험에 참여하게 된 이유다. 내겐 그 기회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 몇 달 간 미국, 유럽 등의 부유한 나라들은 여러 제약회사들과 백신 거래를 시작했다. 이들 국가는 자국민들에게 접종할 수 있는 백신을 확보했다. 하지만 남아공과 같은 나라들은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국제 원조 기구에서 제공하는 백신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기준보다 소득이 ‘높기’ 때문이다.
남아공의 코로나19 자문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전염병 전문가 살림 압둘 카림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기준에 맞게 가난하지도 않은 나라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코로나19 백신을 구매할 충분한 여력이 없는 빈곤층과 중산층 국가들은 국제 백신개발·공급 프로젝트인 코백스(COVAX)에 의존해야 한다. 코백스는 코로나19 백신을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해 세계보건기구(WHO)와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등이 참여해 만들어진 기구다.
그러나 NYT는 “코백스는 국제 보건기구들의 협력을 통해 자유시장의 불평등을 피하려고 고안됐지만, 이 협정에 붙어있는 계약 조건의 투명성과 책임성에 의문이 제기돼고 있다”고 지적했다.
남아공의 보건 전문가들은 코백스 시스템이 필수적이지만 문제점이 있다고 진단한다. 각국 정부 입장에선 어떤 백신을 언제 접종할 수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미리 비용을 지불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NYT는 “최빈국들은 백신을 거의 무료로 받을 수도 있지만 남아공의 경우 의료 종사자와 일부 고위험군을 포함한 인구의 약 10%을 대상으로 백신을 접종하는데 약 1억4000만 달러를 지불했다”면서 “나머지 인구가 접종할 백신은 정부가 제약회사와 별도의 거래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인권변호사 파티마 하산은 “코백스의 방식에 대해 이미 동의가 이루어졌고, 가난한 나라들은 가격 책정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면서 “코백스는 가격이 공정하다고 말하지만 투명성에 대해선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남아공은 코로나19 2차 유행에 직면해 있다. 보건당국은 변이 바이러스가 더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킬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빈곤층에겐 새로운 봉쇄령도 공포다. 1차 유행 당시 봉쇄령은 경제를 마비시켰고, 많은 사람들이 판잣집에 살면서 식수 등을 공유해야 했다. 이들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는 요원한 일이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