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기근에 신음한 올해와 달리 새해 영화관은 기대작들로 풍성할 전망이다. 2021년 개봉 라인업에 올해 팬데믹 여파로 밀려난 수백억원 규모 대작들까지 가세하면서 극장가는 전례 없이 치열한 경쟁이 예고돼 있다. 영화계 안팎에서는 벼린 신작과 코로나19 백신·치료제에 힘입어 영화관이 정상화 수순을 밟을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먼저 올해 개봉을 예정했던 작품들이 내년 신작 레이스의 스타트를 끊을 것으로 보인다. 시선을 붙드는 작품 중 하나가 윤제균 감독의 뮤지컬 영화 ‘영웅’이다. 동명 인기 뮤지컬을 스크린에 옮긴 제작비 150억원 규모 대작으로 1909년 10월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담았다. 톰 후퍼의 ‘레미제라블’(2012)처럼 후시가 아닌 현장 라이브 녹음이 진행됐고 뮤지컬 주역 정성화를 비롯해 김고은 나문희 조재윤이 출연했다.
실화를 담은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도 화려하다. 1990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고립된 남북 대사관 공관원의 생사를 오가는 탈출기로 김윤석 조인성 허준호 등 베테랑이 스크린을 메운다. 240억원을 들여 지난해 상반기 모로코에서 촬영을 마치고 올여름 시장을 노렸으나 코로나19로 무산됐다. 이준익 감독은 ‘동주’에 이어 또 한 번 흑백으로 찍은 사극 ‘자산어보’를 선보인다. 흑산도로 유배된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섬의 한 청년을 만나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이야기로 설경구의 첫 사극 작품으로 화제를 모았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변성현 감독의 신작 ‘킹메이커’도 내년 개봉을 준비 중이다.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 운범(설경구)과 선거 참모 창대(이선균) 얘기다.
최근 연기를 결정한 화제작도 포진해 있다. ‘건축학개론’의 이용주 감독이 8년 만에 내놓는 신작 ‘서복’은 복제 인간이라는 흥미로운 소재와 흥행 보증수표 공유 박보검의 출연으로 올 연말 기대를 모았었다. 염정아 류승룡 주연의 뮤지컬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레트로 감성을 버무린 영화다. 마지막 생일 선물로 첫사랑을 찾고픈 아내와 남편의 로드무비로 향수를 자극하는 익숙한 가요들이 이어진다.
다만 내년을 기약한 이들 기대작 대부분이 코로나19 확산세로 개봉 일정을 확정하지 못했다. CJ엔터테인먼트·롯데엔터테인먼트 등 주요 배급사는 설 대목 등을 주시하면서 일자를 타진 중이다.
당초 내년 개봉작 가운데 가장 기대를 모은 작품은 ‘한산: 용의 출현’이다. 1700만명을 동원해 국내 박스오피스 최고 흥행작에 자리매김한 ‘명량’(2014) 김한민 감독 작품이어서다. 이순신 3부작 중 두 번째인 ‘한산’은 임진왜란 개전 후 왜군과의 첫 번째 전면전을 다룬 작품으로 박해일이 이순신 역을 맡았다. ‘명량’에서 만나지 못한 거북선 복원에도 공을 들였다고 전해졌다.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등 화려한 캐스팅을 뽐내는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은 코로나19로 인한 우여곡절 끝에 지난 10월 촬영을 마무리하고 내년 관객을 만날 채비에 한창이다.
거장의 신작도 준비 중이다. 박찬욱 감독은 차기작 ‘헤어질 결심’을 촬영 중이다. 산에서 벌어진 변사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해준이 사망자의 아내를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로 박해일과 탕웨이가 출연한다. 국내에 팬층이 두꺼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송강호 강동원 배두나 주연의 ‘브로커’(가제) 각본을 마무리하고 내년 촬영에 들어간다.
개성 넘치는 장르물도 이어진다. 돈만 된다면 무엇이든 배송하는 드라이버 은하(박소담)가 한 아이를 태우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특송’(감독 박대민), 황정민이 본인의 납치극을 연기하는 ‘인질’(감독 필감성), 2018년 개봉 당시 마니아를 모았던 ‘마녀’(감독 박훈정) 후속작이 개봉을 가늠하고 있다. 차승원 김성균 이광수 주연의 ‘싱크홀’(감독 김지훈)과 최민식 신예 김동휘가 호흡을 맞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감독 박동훈)도 주목된다.
내년 4월 아카데미 시상식 유력 후보로 떠오른 영화 ‘미나리’도 상반기 국내 개봉한다. 미국 영화이면서 한국계 미국인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이 연출하고 역시 한국계인 스티븐 연과 한국의 윤여정 한예리가 출연한 독특한 영화다. 1980년대 미국 시골 마을에 자리 잡은 한인 가정 얘기로 탄탄한 작품성과 호연에 힘입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호평받았다. 특히 LA비평가협회를 비롯해 오스카 전초전 격의 크고 작은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윤여정이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을지 관심이 쏠려 있다.
기대작이 부지기수여서 설레는 관객과 달리 영화계는 영화 개봉 시기 등을 두고 치열한 눈치 싸움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올 한해 유례없는 침체를 겪은 극장가는 예고된 출혈 경쟁에도 관객이 영화관을 찾길 바라고 있다. 한 영화 관계자는 “백신이 나오고 사태가 안정되면 극장도 조금씩 활기를 띨 것으로 본다”며 “어떤 어려운 상황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