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백신 접종을 개시한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을 중심으로 접종 여부를 증명하는 ‘백신 여권(vaccine passport)’ 개발 작업이 한창이다. 백신 확보량과 접종 속도에서 국가 별로 격차를 보이는 상황에서 글로벌 경제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미국 CNN방송은 27일(현지시간) “몇몇 기업들과 기술 그룹들이 코로나19 검사 및 백신 접종 여부에 대한 개인 정보를 업로드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 국가 안에서 사무실, 영화관, 경기장, 콘서트장 등 공공장소에 출입할 때는 물론이고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국경을 넘나들 때 요구되는 ‘디지털 자격 증명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스위스 제네바의 비영리단체 코먼스 프로젝트와 세계경제포럼(WEF)는 백신 여권에 활용될 ‘코먼패스’ 앱을 개발 중이다. 사용자가 병원 등 의료 기관에서 받은 백신 접종 기록을 이 앱에 올려두면 민감한 개인정보가 제거된 통행증이나 의료 증명서가 QR코드 형태로 발급된다. 각국의 보건당국은 출입자가 제시한 QR코드를 바탕으로 출입 자격을 부여한다.
코먼스 프로젝트의 토머스 크램튼 홍보담당자는 CNN에 “국경을 넘을 때마다 코로나19 검사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국경을 넘을 때마다 백신을 맞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프리카 여행시 황열병 백신 접종 증명서인 ‘옐로 페이퍼’를 제출해야 하는 점을 거론하며 “백신 여권은 디지털 옐로 페이퍼가 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케세이퍼시픽·루프트한자·유나이티드항공·버진애틀랜틱·제트블루·스위스항공 등 주요 항공사들과 수백개의 의료 법인이 이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IBM 같은 거대 정보기술(IT) 기업들도 백신 여권 개발에 뛰어들었다. IBM은 ‘디지털 헬스 패스’라는 자체 앱을 개발해 자사 사업장에 출입하는 이들이 코로나19 검사, 백신 접종 여부 등을 등재할 수 있도록 했다.
백신 여권 개발이 일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 격차를 더욱 확대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미 충분한 백신을 확보하고 접종을 시작한 미국과 유럽 등 서구 선진국들과 그렇지 못한 국가들 사이 ‘백신 격차’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백신 여권은 글로벌 경제 불평등 심화 현상에 쐐기를 박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미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이날까지 전 세계 백신 접종 인구는 420만명으로 추산된다. 대다수가 백신 접종을 일찍 시작한 미국과 영국 국민이다. EU에서도 27일 대규모 접종이 시작된 만큼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접종자가 빠르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백신 접종이 예정대로 빠르게 이뤄져 집단면역 수준에 다다른 선진국들이 경제 활동을 재개할 때, 백신 도입이 뒤처진 국가들은 봉쇄를 이어가는 상황이 동시에 펼쳐질 가능성도 높다. 미 비영리단체 전자프런티어재단은 “백신 여권은 불평등의 도장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