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한’ 한국형 히어로, 여러 도전 끝 터질 게 터졌다

입력 2020-12-27 18:04
'경의로운 소문' 중 한 장면. OCN 제공

고아이면서 장애를 지닌 소문(조병규)은 어느 날 벼락에 맞듯 느닷없이 초능력을 얻은 뒤 학교폭력 가해자를 때려눕힌다. 은영(정유미)은 영웅이 될 운명을 안고 태어났지만, 이런 능력이 매우 피곤하고 버겁다. 올해 등장한 ‘경이로운 소문’(OCN)과 ‘보건교사 안은영’(넷플릭스) 속 두 히어로는 다른 것 같지만 여러모로 닮아있다. 현실적이고 허점이 많으며 남모를 아픔을 갖고 있다. 빈틈이 많아 엉성하기 일쑤지만, 혼자서 헤쳐나가긴 역부족이다. 이때 선한 능력을 지닌 조력자가 등장한다. 이들의 고군분투를 보고 있으면 짠한 마음마저 든다. 올해 한국형 히어로물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지극히 한국적인 ‘짠한 히어로’가 대세다.

한국형 히어로 전성시대
‘경이로운 소문’이 한국형 히어로물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악귀 사냥꾼인 카운터들이 국숫집 직원으로 위장해 악귀들을 물리친다. 초현실적 배경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바탕으로 펼쳐지던 히어로물과 다르게 주변에서 있을 법한 전개가 특징이다. 괴력·사이코메트리·치유 등 경이로운 능력을 지닌 카운터들이 저마다 허점 하나씩을 지니고 있어 더없이 인간적이라는 점도 매력적이다. 이때 판을 엎는 방법은 오로지 연대뿐이다.

‘보건교사 안은영’ 인물들도 왠지 어수룩하다. 은영이 욕망의 잔여물인 젤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이용해 학생들을 구하는 내용인데, 그는 여느 히어로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우진 않는다. 누군가를 구하는 운명을 귀찮아하고, 조금은 지쳐있다. 가장 힘에 부치던 순간 은영은 한문교사 홍인표(남주혁)가 보호막에 둘러싸여 있다는 걸 알아챈다. 은영이 영웅이라면, 인표는 충전기다. 외로운 세상을 살아낸 은영과 불편한 다리를 통 넓은 바지로 감추고 살아온 인표는 불완전한 어른을 대변하고, 이들의 상호보완성이 관계의 핵심이다.

'보건교사 안은영' 중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인간에게서 비롯된 악(惡)
히어로물은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심리가 강해질수록 빈번히 탄생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한국형 히어로들이 활약한 이유다. 현실엔 없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 악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데서 뿜어 나오는 카타르시스는 위로가 됐고, 감성을 자극하는 한국적 요소는 대중의 공감을 끌어당기기 수월했다.

지금의 한국형 히어로는 여러 도전 끝에 얻은 수확이다. 올해 초 등장한 tvN 드라마 ‘방법’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10대 소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작품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저주로 사람을 해하는 주술인 ‘방법’(謗法)을 소재로 해서다. 연상호 감독은 어릴 적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손발이 오그라진다’는 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방법' 중 한 장면. tvN 제공

앞서 영화 ‘검은 사제들’(2015), OCN ‘손 더 게스트’(2018)도 비슷한 소재인 퇴마를 다뤘는데, 이 과정에서 악귀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한국형 히어로물의 특징이 자리 잡았다. ‘방법’에서는 악행을 일삼는 대기업 회장에게, ‘손 더 게스트’에서는 범죄자의 몸에 악귀가 들었다. ‘경이로운 소문’에서도 이런 요소가 힘을 발휘한다. 이미 악한 욕망이 들어찬 인간에게 악귀가 침투하는 것으로 설정하면서 맥락을 강화했다.

이 작품들 모두 악함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는데, ‘보건교사 안은영’과 ‘스위트홈’(넷플릭스)에도 같은 주제 의식이 녹아 있다. 이 작품들에서는 크리처가 등장하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혹은 전염에서 비롯된 괴생명체가 아닌, 오로지 인간의 욕망에서 탄생한 악을 형상화했다.

영화 '염력' 중 한 장면. 제작사 제공

한 많고 짠해 더 공감
한국형 히어로 탄생 배경에는 휴머니즘이 녹아 있다. KBS ‘아이언맨’(2014)의 주인공 주홍빈(이동욱)은 한(恨) 때문에 히어로가 됐고 영화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2016)의 홍길동(이제훈) 역시 사명감이나 정의가 아닌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힘을 발휘한다. ‘경이로운 소문’ 역시 인류의 생존이나 지구의 평화처럼 거창한 이유를 들먹이지 않는다. 가족이 그립다는 현실적인 목표가 영웅의 임무를 받아들이게 했다. 구하려는 대상도 이웃이고 친구이며 가족이다.

‘짠한 히어로’ 서사도 여러 작품을 거쳐 완성됐다. 홍길동은 여느 히어로와는 달리 거대한 권력 앞에서는 적당히 둘러대며 잠시 굴복했다가 반전을 꾀한다. 홍길동에서 시작한 허술한 히어로의 맥락은 영화 ‘염력’(2018)에서 공고해졌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지금의 한국형 히어로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갑자기 초능력이 생긴 아빠 석헌(류승룡)이 세상과 맞서는 이야기인데, 여기다 재개발, 철거민 문제 등 현실적인 사회문제를 펼쳐냈다는 점 역시 한국형 히어로물의 특징이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