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유럽연합(EU)이 6600억 파운드(약 991조원) 규모의 자유무역 협정을 포함한 양측 미래관계에 대한 협정을 타결지었다. 올해 초부터 약 1년간 이어진 양측의 ‘포스트 브렉시트’ 협상이 크리스마스 전날인 24일(현지시간), 전환기간 종료 일주일을 앞두고 극적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영국은 당초 지난 1월 말 EU를 공식 탈퇴했다. 하지만 급작스런 탈퇴에 따른 혼란을 줄이고자 양측은 기존의 무역·이동 조건을 그대로 유지하는 11개월의 전환기간을 두기로 하고 이후 미래관계 협상을 계속해왔다. 협상 마지막까지 어업권·사법관할권 등의 문제로 갈등을 빚으면서 양측이 합의 없이 헤어지는 ‘노딜 브렉시트’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영국과 EU가 미래관계 합의에 성공하면서 2016년 6월 영국이 국민투표로 브렉시트를 결정한 이래 4년 반을 끌어온 양측의 ‘이혼 조정’ 절차도 마침표를 찍게 됐다. 합의안은 연내 양측 의회에서 통과될 전망이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이날 성명을 통해 “영국은 다시 국경, 법, 통상, 재정, 수역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했다”며 “2021년 1월 1일부터 (EU에게서) 정치·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한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무엇이 달라지나
미래관계 협정에 따라 내년 1월 1일부터 원칙적으로 영국과 유럽 사이에는 관세 및 규제 국경이 세워진다. 영국이 EU 단일시장과 관세 동맹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게 되는 것이다.다만 양측은 협의 과정에서 무관세가 적용되는 상품 수량에 제한을 두지 않도록 하는 자유무역협정(FTA)에 서명했다. 지금처럼 ‘무관세, 무쿼터’ 교역을 계속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단 영국 정부가 계속 EU 측으로부터 무관세 혜택을 받기 위해선 EU와 동일한 노동환경 규제 및 보조금 정책을 준수해야 한다.
EU 회원국이 아닌 국가 중에서는 가장 나은 대우를 받게되는 셈이지만 각종 세관 서류가 대거 늘어나면서 영국 기업 및 개인들의 시간 및 비용 부담이 가중될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인들은 더이상 EU 내 이동의 자유도 누릴 수 없다. 영국 사람이 EU 회원국에서 90일 넘게 장기 체류하려면 따로 비자를 신청해야 한다.
영국에서 전문 자격을 취득한 변호사, 회계사, 항공 관제사, 조종사 등도 내년부터는 영국 내에서만 그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다.
영국은 더 가난해질 것
영국과 EU 모두 이번 합의를 “양측에 적절한 합의”라고 자축했지만 결국 브렉시트가 영국 경제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미국 CNN방송은 이날 “영국과 유럽의 새 무역 협정은 단기적으로는 영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면서도 “영국이 300여년 만의 최악의 불황과 일자리 위기를 겪고 있는 이 시점에서 결국 (브렉시트는) 영국을 더 가난하게 만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국 예산 책임청에 따르면 브렉시트 이후 영국의 국내총생산량은 그들이 EU에 남아있는 것에 대비해 장기적으로 4% 줄어들 것으로 관측된다.
영국 정부는 새 협정으로 자국 기업들이 제출해야 할 세관 신고 서류가 연간 2억1500만장 늘어나면서 향후 75억파운드(약 11조2614억원)를 추가 부담해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무관세 무역에 합의했음에도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높아진 비용은 더 비싼 소비자 가격, 더 많은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새 협정으로 이민 제도도 바뀌며 영국으로 유입되는 값싼 저숙련 노동력도 크게 줄어든다. 전국농민연합(NFU)은 “매년 영국 농장에서는 수확 기간 7~8만명의 인력을 필요로 한다”며 “충분한 인력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농작물이 썩을 때까지 밭에 방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유럽의 금융 수도’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런던이 금융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할 위기에 처한 것도 뼈아프다. 세계적 회계컨설팅업체인 EY에 따르면 브렉시트가 본격화된 2016년 이후 국제 금융기업들은 1조2000억파운드에 달하는 자산과 7500명의 일자리를 영국에서 빼내 아일랜드 더블린, 독일 프랑크푸르트, 프랑스 파리, 룩셈부르크 등 EU 회원국으로 이전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