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도 우승’ 울산 현대 3년차 사원의 ACL 우승 동행기

입력 2020-12-23 18:16 수정 2020-12-23 20:03
이청용(왼쪽)과 함께 포즈를 취한 울산 현대 이경민 사원.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휴대폰 배터리가 1분에 1%씩 떨어질 정도였죠.”

프로축구 울산 현대는 올 시즌 막바지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ACL)에서 우승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그런데 우승 업적만큼 울산의 홍보마케팅도 화제를 모았다. ACL 기간 울산의 소셜미디어(SNS) 계정엔 하루에도 십 수개씩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은 콘텐츠가 올라와 팬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특히 이란 팬들의 호응은 이례적이었다. 미리 결승전에 선착해있던 페르세폴리스의 우승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에스테그랄 등 타 구단 이란 팬들이 울산 SNS로 몰려와 뜨거운 응원전을 펼친 것. 울산 홍보마케팅팀 3년차 막내급으로 SNS 계정을 관리하는 이경민(29) 사원은 카타르 현지에서 선수단과 동행 중 서아시아발 ‘애정공세’ 알림을 직접 받았다. 그는 23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휴대폰을 켜놓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역발상’으로 서아시아 팬 잡았다
울산 현대 마케팅팀이 올린 이란 팬 대상 이벤트 게시물. 울산 현대 인스타크램 캡처

한국에 있던 울산 홍보마케팅팀은 뜨거워진 아시아 팬들의 관심에 바로 ‘역발상’ 아이디어를 냈다. ACL 결승을 앞둔 지난 16일 이란 팬들을 대상으로 한 ‘응원 댓글 달기’ 이벤트를 공지한 것. 멋진 응원 댓글을 단 팬 5명에게 유니폼을 보내준다는 이 이벤트 게시물은 심지어 생소한 페르시아어로 작성됐다. 울산은 ‘물 들어올 때 노 젓기’ 위해 페르시아어 번역 업체에 의뢰까지 해 해당 이벤트 게시물을 만들었다. 응답한 동아시아 구단에 서아시아 팬들은 열광했다. 이 사원은 “1000명 넘는 이란 팬 분들이 참여했을 정도로 ‘흥한’ 이벤트가 됐다”며 “어떤 이란 분은 아예 한국어로 재밌는 응원 영상을 찍어주셔서 당첨자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한국에 있는 직원들만큼이나 현지의 이씨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경기 날 경기 전후 기자회견과 관련해 AFC 측과 수시로 갖는 미팅, 기자회견이 끝나고 회견 전문과 보도자료를 전송하는 일도 이씨의 업무였지만, 아침 식사부터 훈련을 거쳐 취침할 때까지 선수들과 동행하며 각종 콘텐츠를 촬영해 SNS에 업로드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에 미디어와 팬들의 현지 동행도 불가능했던 상황. 선수들과 코치들이 경기를 준비할 때, 그들의 여정을 전하고 보다 빛나게 만들 현지의 유일한 직원은 ‘홍보담당관’인 이씨 뿐이었기 때문이다.

‘흥했던’ 현지 콘텐츠…‘범아시아’ 구단 된 울산
김인성 뒤를 쫓는 이경민 사원.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이씨가 콘텐츠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선수들이 우승 부담을 느끼지 않게끔 하는데 있었다. 사실 울산은 카타르에 갈 때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K리그1과 대한축구협회(FA)컵 우승을 모두 눈 앞에서 놓친 상황에서 선수들은 휴가지가 아닌 아시아 대회를 치르러 이역만리로 떠나와야 했다. 게다가 카타르 현지는 코로나19 탓에 경기장-훈련장-숙소로 이어지는 ‘버블’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어 수시로 다른 팀들과 마주쳤다. 초반엔 수원 삼성과 같은 숙소를 써 괜찮았지만, 결승전 전엔 페르세폴리스와 한 숙소를 쓰기도 했다. ‘적들과의 동침’에 묘한 분위기까지 펼쳐지는 상황에 모두가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어, 콘텐츠에 압박감 보다는 재미를 담으려 한 것. 이씨는 “토너먼트에 진입한 시점부터 선수단에도 ‘부담 갖지 말고 보여주자’ ‘즐기자’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던 것 같다”며 “그런 모습을 재미있는 콘텐츠로 담아내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 과정에서 김인성·윤빛가람·주니오·현대고 3인방(박정인·서주환·이상헌) 등이 참여한 ‘굿나잇 메시지’ 영상도 나왔다. 선수들은 자연스럽게 선수들에게 경기 소감을 밝힌 뒤 가수 성시경이 라디오 프로그램 말미에 했던 것처럼 부드럽게 “잘자요”를 읊조린다. 이 영상들은 “꿀 떨어진다” “귀엽다”는 팬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 모았다. 이씨는 “경기가 끝나면 한국은 취침시간이라 ‘시차’를 이용한 쉽고 재밌는 콘텐츠를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선수들이 처음엔 빼다가도 말을 잘 해줬다”며 웃었다.

촬영하는 모습.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물론 울산이 큰 관심을 받은 데엔 선수들의 노력과 팀 성적이 주효했지만, 하루에도 여러 개씩 올라오는 현장감 있는 콘텐츠가 팬들의 시선을 모으는 역할을 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이런 노력의 결과 울산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ACL 전 3만2000명에서 5만6500명으로 늘었다. 개당 1000개 정도 눌리던 ‘좋아요’ 수도 수만 개가 찍히고 있고, 동영상 조회수도 5만뷰에서 11만뷰까지 기록되고 있다. 지난 8~14일 99만 명이었던 인스타그램 방문자 수는 15~22일 기준 166% 성장했고, 결승전이 끝난 지난 20일엔 34만6000명이나 방문했다. 이씨는 “단장님을 비롯해 윗분들이 어떤 아이디어를 내면 한 번 해보라고 독려해주시는 분위기라 가능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울산과 K리그는 동아시아를 넘어 서아시아의 관심까지 받을 수 있게 됐다.

ACL 우승 경험한 3년차 직원
우승 후 포즈를 취한 울산 현대 장민기 주무, 이경민 사원, 윤희원 사원, 김광국 단장, 이말순 팀장, 김래오 장비담당관.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입사하며 아시아 1등인 ACL 우승을 꼭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니까 정말 아무 생각이 안 들었죠. 너무 기뻐서 모든 직원이 다 같이 그라운드로 뛰쳐나갔어요. 순수한 행복감이었던 것 같아요.” ACL이란 큰 무대 우승을 경험하는 건 이씨가 “커리어와 인생에 남는 기억”이라 떠올릴 정도로 입사 3년차 직원에겐 뜻 깊은 일이었다. 그만큼 처음 카타르에 도착했을 땐 실감이 안 나고 모든 게 신기했다고 한다. 이씨는 “여러 나라 팀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데, 심지어 경기장이 모두 월드컵을 위해 새로 지어진 경기장이었다”며 “에어컨이 나오는 경기장은 처음이었는데 그 위용에 압도당했다”고 했다.

베테랑 선수들은 그런 이씨에게 오히려 힘을 줬다고 한다. 이씨는 “3일에 한 번씩 경기를 치르는 일정임에도 월드컵을 뛰어본 선수들이 ‘너무 힘들게 생각할 거 없고 월드컵이라 생각하면 된다’고 말해줬다”며 “베테랑 선수들이 팀에 많으면 이런 장점이 있구나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주장 신진호의 한 마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결승전 경기 전 기자회견 직전 함께 경기장을 돌아보던 이씨가 신진호에 “선수들 덕분에 결승전도 와 본다”고 말하자 신진호가 이씨에 “선수들만 잘해서 된 게 아니라 직원들도 잘 해서 된 것”이라고 말해준 것. 이씨는 “직원들에게까지 힘을 주고 신경써주는 게 마음 속 울림이 컸다”고 했다.

“국가대표급의 좋은 선수들과 일을 해봤다는 게 큰 영광이고, 우승이라는 좋은 경험을 선물해준 선수들에게 고맙습니다.”

홍보팀 직원, 축구가 삶에 깊게 투영되는 삶
대진 추첨에 김도훈 감독과 동행한 이경민 사원.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스포츠 산업이 발전하면서 스포츠 구단 관계자나 스포츠 업계 진출을 꿈꾸는 청년들도 늘어났다. 그만큼 경쟁률도 세다. 특히 울산처럼 ACL에 나가는 강팀의 경우 입사 자체가 쉽지 않다. 영어 구사 능력에 행정 등 실무 능력까지 두루 갖춰야 한다. 이씨도 네덜란드 교환학생과 리투아니아 인턴십 등을 통해 영어와 국제업무를 익힌 데다 입사 전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에서 실무 경험도 쌓은 끝에 8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울산맨’이 될 수 있었다. “관심사가 뭐냐고 물어보면 축구 말고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축구 밖에 몰랐어요. 울산 같은 팀에 들어오게 된 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이씨가 입사 후 경험한 홍보마케팅팀 직원의 삶은 ‘24/7’, 즉 ‘연중무휴’였다. 일이 갑자기 생기는 경우도 많고 매 시간, 자정까지 언론을 응대해야 하는게 구단 홍보팀 직원의 삶이다. 그럼에도 업무를 즐길 수 있었던 건 축구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이씨는 “축구가, 일이 제 삶에 깊게 투영되는 게 이 일의 매력인 것 같다”고 했다.

울산은 이번 ACL 우승을 끝으로 감독이 바뀌고, 선수단도 대대적인 개편이 필요한 상태다. 이씨도 2년 넘게 일하던 홍보 업무의 마지막을 ‘우승’으로 장식하고 내년부터는 홈경기 관련 파트로 자리를 옮길 예정이다. 그래도 이씨의 꿈은 변함이 없다.

“축구가 영화 보는 것처럼 좀 더 대중적인 문화로 자리잡았음 좋겠어요. 다른 직원들과 같이 힘써서 조금이라도 그 길에 기여하고 싶네요.”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