亞 정복 울산 ‘파란 치타’ 김태환 “간절했던 우승, 내려놨더니 따라와”

입력 2020-12-23 06:00 수정 2020-12-23 06:00
울산 현대 김태환(가운데)이 지난 18일 카타르 알 에글라 피치 훈련장에서 동료 이상헌(왼쪽), 설영우와 연습 중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지난 21일 통화한 울산 현대 ‘치타’ 김태환(31)의 목소리는 평소 그의 이미지와 안 어울리게 다소 지쳐 있었다. 카타르에서 오전 2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김태환은 혹시라도 가족에게 코로나19가 옮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홀로 자택에서 격리 생활을 하고 있다. 새해가 되어서도 이대로 다음달 3일까지 홀로 지내야 한다. 인터뷰 도중 보건소에서 찾아와 누른 초인종 소리가 휴대전화 스피커 사이로 들려왔다.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챔피언 울산과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주전 측면수비수 김태환은 이번 대회 우승으로 K리그 선수로서 따낼 수 있는 모든 우승컵을 수집했다. 수년 연속으로 팀이 리그 우승에 실패해 의욕을 잃을 법도 했지만, 울산 선수단은 결국 우승을 향한 의지를 올해 안에 결과물로 만들어냈다. “마지막에 웃자고 팬들과 한 약속을 지켜서 정말…”하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해피엔딩이라 다행이에요”라며 웃었다.

우승 좌절, 그리고 번아웃

울산 현대 김태환이 지난해 11월 23일 울산종합운동장에서 전북 현대 정혁을 상대로 공중볼 경합을 벌이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ACL 대회 전까지 김태환은 정신적으로 ‘번아웃’ 상태였다. 올 시즌까지 이어진 준우승 징크스는 그를 포함한 울산 선수단에 충분히 트라우마로 남을만한 일이었다. 4년간 팀을 이끈 김도훈 감독이 리그 우승 실패를 이유로 팀에서 떠날 것이란 설이 파다했고, 당연히 팀 분위기도 좋지만은 않았다. FA컵 결승에서마저 고배를 마신 직후 대표팀에 소집돼 오스트리아로 간 그는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대표팀에서만큼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대표팀 선수로서의 몫이라 생각해서였다.

김태환은 “우승이 무산된 뒤 한동안 밥도 안 들어갔다. 잠도 잘 못 잤다”고 털어놓으며 “대표팀에서도 쳐진 모습을 보일까봐 마인드 컨트롤을 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까지 노력해도 밖에서는 우승을 해야 우리 노력을 알 수 있을 텐데, 우승을 못하면 선수들끼리만 얼마나 노력했을지 알 텐데 하는 생각에 너무 속상했다”고 했다. 대표팀에서 코로나19 집단 감염 사태로 받은 충격도 있었다. 김태환은 “(카타르로 합류하며) 혹시 우리 팀에 코로나19를 퍼뜨리진 않을지, 가자마자 격리를 해야 하는데 팀에 도움이 될 수는 있을지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내려놨더니 오히려 결과가”

울산 현대 김태환이 지난 9일 카타르 알자누브 스타디움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단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결과적으로 그는 울산이 조별리그를 지나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과정에 주전으로 나서 우승에 힘을 보탰다. 김태환은 “우승을 눈앞에서 하나씩 놓치다 보니 정신적으로 정말 쉽지 않았다”면서 “카타르에 가면서는 마음을 최대한 비우고, 훈련 때를 빼면 최대한 축구 생각을 안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훈련과 경기할 때만 축구에 집중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최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그는 ”경기에 임하면서도 부담을 가지기보다 하던 대로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고 복기했다.

그렇게도 간절했던 우승을 향한 열망을 내려놓자 신기하게도 결과가 따라왔다. 김태환은 “팬들께서는 (리그에서의 결과를 보고) 선수들이 우승에 덜 절실했던 것 아니냐 오해하실 수 있다. 당연한 얘기고 충분히 이해한다”라면서도 “누구보다 저희가 (우승 좌절에) 가장 아쉬웠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정말 저희가 제일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살면서 선수 생활 동안 ACL 우승을 해보지 못한 선수들이 해본 선수보다는 훨씬 많다. 우리는 그걸 해낸 것”이라면서 “올해 고난이 너무 많았지만 마지막이 해피엔딩이라 다행”이라고 말했다.

울산 선수단은 카타르행 전부터 김도훈 감독이 팀을 떠난다는 설이 흘러나오면서 자연스레 선수단 개편도 예상됐다. 울산 선수단 역시 이를 모를 리 없었고, 그 아쉬움을 ACL 무대에 최대한 쏟아부으려 했다. 김태환은 “함께 뛰는 동료들과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자고 한 게 서로 동기부여가 된 것 같다”면서 “선수들뿐 아니라 감독님과 코칭 스태프들도 이 구성으로 함께 뛰는 게 마지막이라 생각했기에 더 열심히 뛴듯하다”고 말했다. ACL 무대는 울산 선수단에도 문자 그대로 ‘라스트 댄스’였던 셈이다.

“울산은 내게 짝사랑”

울산 현대 김태환(왼쪽)과 김도훈 감독이 지난 2일 카타르 유니버시티피치 훈련장에서 연습 중 장난스럽게 공을 다투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김태환은 ACL 우승으로 숙원을 풀었지만 대신 연말을 쓸쓸히 보내야 한다. 아내의 생일인 23일도, 뒤이은 크리스마스도 모두 혼자 집에서 지낸다. 지난 5월 태어난 둘째 아들에게 만에 하나라도 코로나19가 옮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족을 모두 고향 광주로 내려보냈다. 그는 “우승 직후 가장 먼저 아내에게 연락했다. 지금도 많이 보고 싶다”면서 “경기장에서는 약물 검사가 있어서 바로 전화 걸지 못하고 숙소로 가서 바로 영상통화를 했다. 우승 뒤 5시간 만에 귀국 비행기를 탔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직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한 피곤함이 역력했다.

김태환은 팀을 떠나는 김도훈 감독을 향해서도 고맙고 아쉬운 맘을 고백했다. 김도훈 감독은 우승 직후 홍철이 인스타그램 라이브방송으로 팬들에게 소감을 말하라고 하자 “죄송하다”고 먼저 입을 열어 팬들을 가슴 아프게 하기도 했다. 그는 “감독님이 오시고서 팀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건 분명한 사실이다. 좋은 선수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계속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건 아니다”라면서 “4년간 계시면서 너무 고생이 많으셨다고 감독님을 위로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김태환은 울산이 본인에게 어떤 존재냐는 물음에 “짝사랑”이라고 말했다. 울산은 그의 선수 생활 중 가장 오래 뛴 팀이다. 울산을 향한 애정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개석상에서 과시해왔고, 열정적인 플레이 덕에 그는 울산 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그는 “다른 건 몰라도 울산이 절 생각한 것보다 제가 더 울산을 사랑한다는 점은 팬들께서 알아줬으면 좋겠다. 진심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팬들이 남겨준 응원 글을 보며 내가 울산에서 뛰어온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너무 큰 힘이 됐고 감사하다”며 고마움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