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기사에는 영화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원더우먼 1984’의 메시지는 도입부에 바로 등장한다. 어린 다이애나는 데미스키라 백성 앞에서 최고의 용사를 가리는 아마존 레이스에 도전한다. 다이애나는 내로라하는 전사들을 제치고 1등으로 들어오지만, 지름길을 이용했다는 이유로 탈락한다. 대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활쏘기·기마술이 장관이다. 의미심장한 건 투덜대는 다이애나에게 어머니가 건네는 대사다. “‘진실’보다 중요한 건 없단다. 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을 때 영웅이 되는 거야.”
‘원더우먼 1984’가 23일 개봉한다. 지난 2017년 선보인 ‘원더우먼’ 이후 3년 만이다. 전쟁의 불씨가 가득했던 전편과 달리 이번엔 미국 시장 경제가 호황을 누리던 1980년대를 배경으로 새로운 적과 만난 원더우먼의 활약을 그린다. 코로나19로 신작 기근에 시달리는 최근 영화관에 단비 같은 영화는 현재 예매율 1위를 달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웅의 탄생을 그린 전작보다 규모는 장대해졌고 주제의식은 더 깊어졌다. 영웅의 성숙을 그린 이 영화에서 원더우먼은 ‘진실’을 깨닫고 진정한 영웅이 된다. 그러나 진실은 모호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원더우먼 1984’가 말하는 진실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인류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원더우먼은 일상에 도사린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한다. 과속 교통사고를 막고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시민을 구한다. 빨강 파랑의 원더우먼 수트를 입은 그는 진실의 올가미로 백화점 위아래 층을 부지불식 간에 오가며 무장 강도를 제압한다. 원더우먼은 하지만 공허하다. 수십년을 애타게 그리워한 연인 스티브 트레버(크리스 파인)가 곁에 없어서다.
박물관에 들어온 ‘황수정’은 원더우먼의 삶에 파문을 일으킨다. 소원을 이뤄준다는 허무맹랑한 이 황수정에 빈 소망이 정말로 실현되면서 죽었던 연인 스티브가 되살아난다. 재회의 감격도 잠시 커다란 문제들이 연달아 벌어진다. 맥스 로드(패드로 파스칼)가 황수정으로 전 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다.
과거 왕국을 재건하고 싶다는 석유 재벌의 소원이 이뤄지면서 이집트 곳곳에 난민 폭동이 일어난다. 핵미사일을 더 가지고 싶다는 미국 대통령의 소원으로 러시아와 전쟁까지 벌어진다. 제3차 세계대전이다. 거리에는 벼락부자가 넘쳐나고 시비가 붙은 상점 주인에게 “죽어버리라”고 던진 욕설까지 현실이 된 세계는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문제는 황수정이 소원을 빈 사람의 건강과 재산 같은 중요한 것을 앗아간다는 점이다. 초월적 존재인 원더우먼도 스티브가 살아나면서 피를 흘린다. 해결 방법은 딱 한 가지. 소원을 포기하는 것이다. 원작 DC코믹스에서 원더우먼의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하는 치타(크리스틴 위그)도 황수정으로 탄생한다. 외톨이였던 그는 “원더우먼처럼 멋지고 아름답고 강한” 인물이 되는 대신 인간성을 포기한다.
영화가 던지는 ‘진실’이란 주제의식이 선명해지는 것도 이때쯤이다. 욕망이 난무하는 세상은 절망이고 내가 노력해 얻지 않은 것은 한낱 신기루다. 고로 소원 같은 편법에 의지하지 않고 매일 최선을 다해 사는 모든 이들이 영웅이라는 메시지다. 풍요로움 속 경제 성장의 욕망이 들끓던 1980년대 미국이라는 극 배경도 이 같은 메시지를 두드러지게 하려는 장치로 보인다.
‘원더우먼’ 시리즈의 백미는 극장가의 메가 트렌드가 된 여성 서사다. 영화 도입부를 꾸미는 아마존 경기에서 수만명의 여성들이 경기를 즐기는 모습은 이채로운 감상을 선사한다. 원더우먼과 치타는 여성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스펙터클을 키운 이번 편에는 기존 원더우먼 수트에 더해 황금 아머가 새로이 등장한다. 이집트에서 벌어지는 카체이싱 장면이나 공중전·수중전으로 ‘태양의 서커스’를 연상케 하는 치타와의 결투신, 대형 쇼핑몰 전투신 등 감탄을 내는 장면들이 부지기수로 이어진다. 전작에 이어 메가폰을 잡은 패티 젠킨스 감독의 의지가 반영됐다. 18일 화상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갤 가돗은 “감독님께서 CG(컴퓨터그래픽)를 최대한 적게 하자고 강조하셨다. 치타와는 지상에서도 수중에서도 공중에서도 다 (실제로) 싸웠다”고 전했다. 아이맥스관 등 특수관에서 보는 걸 추천한다.
다만 전형적인 히어로물 공식을 따라가는 듯한 전개는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주요 설정이 되는 황수정에 대한 설명, 스티브와의 감정선 등도 살짝 생략된 느낌이다.
히어로는 위기에서 태어난다. ‘원더우먼 1984’도 비슷한 인상을 풍긴다 코로나19가 영화의 메시지를 되레 도드라지게 만들어서다. 원더우먼은 “힘든 세상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할리우드발 히어로물이 으레 담고 있는 이 보수적인 ‘현실 예찬론’은 코로나19로 신음하는 시민들에게 일상으로의 복귀를 향한 의지로 새롭게 읽힐 듯하다. DC 유니버스를 사랑하는 골수팬들을 겨냥한 쿠키 영상이 극장 문을 나서는 관객의 등을 두드려준다. 151분.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