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재판을 하다 보면 어린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뭐가 잘 사는 건지는 나도 모릅니다. 대신 스타일은 한눈에 들어옵니다.”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은 내 페티쉬일 뿐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온라인상에서 논란 중인 현직 판사의 글 일부다. 소년 재판을 담당하며 법정에서 만났던 미성년자들의 외모를 평가하고 자신의 페티쉬(성적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물)까지 언급한다. 네티즌들은 “교복 입은 여학생들을 보며 이런 저급한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며 분노하고 있다.
문제의 글을 쓴 사람은 김태균 수원지방법원 판사다. ‘페티쉬’라는 제목의 이 글은 15일 법률신문 ‘법대에서’ 코너에 등장했다. 기고문은 “나의 여자 보는 눈은 고전적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칠흑같이 긴 생머리, 폐병이라도 걸린 듯 하얀 얼굴과 붉고 작은 입술, 불면 날아갈 듯 가녀린 몸. 물론 지금은 그와는 거리가 먼 여자와 살고 있지만 나이가 들어도 이상형은 잘 변하지 않는다. 아직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김 판사는 다음 문단에서 “소년 재판을 하다 보면 법정 안은 물론 밖에서도 어린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족히 25살 이상 차이 나는 그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할 말이 없다”고 썼다. 그러면서 “칭찬도 훈계도 한두 번이다. 뭐가 잘 사는 건지는 나도 모른다. 대신 스타일은 한눈에 들어온다. 생김생김은 다들 이쁘고 좋은데 스타일이 거슬린다”며 외모를 평가한다.
그는 “호섭이 같은 바가지 머리는 머리카락이 눈을 찌를 듯 말 듯 한 곳까지 길렀다. 줄여 입은 교복은 볼품없다. 짙은 화장과 염색한 머리는 그 나이의 생동감을 지워버린다”며 “그래서 말한다. ‘염색도 파마도 하지 않은 긴 생머리가 이쁘다. 머리는 시원하게 넘기든지 짧게 자르는 게 단정해 보인다. 바지, 치마 줄여 입지 말라’. 그렇게만 하면 정말 이뻐 보일 것 같은 안타까움 때문”이라고 적었다.
이어 “저 친구들은 내 눈에 이뻐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며 “저 친구들도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을 터,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꾸미고 거기에 만족하면 그것뿐이다. 아무리 재판하는 판사라고 해도 그걸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소싯적 천지간 분별 못 하고 체 게바라처럼 살겠다며 반항과 똘끼 충만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단정(端正) 운운하던 그 옛날의 학주의 모습은 이제 내 모습이 됐다”는 말도 덧붙였다.
‘페티쉬’를 언급한 부분은 이다음 나왔다. 김 판사는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은 내 페티쉬일 뿐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재판은 옳고 그른 것을 가릴 뿐 좋은 것을 강요하는 곳이 아니다. 소년재판도 가사재판도 모두 마찬가지”라며 “세상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지만 그것은 오직 ‘나에게만’ 좋고 나쁠 뿐이다. 강요된 좋음은 강요하는 자의 숨겨진 페티쉬일 뿐”이라고 했다.
글이 공개되자 댓글 창에는 네티즌이 몰려들며 공분이 일었다. ‘좋고 싫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을 전하고자 쓴 글이었으나 필자의 메시지를 떠나, 그 과정에서 사용된 사례와 일부 단어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었다. 특히 미성년자의 외모를 세세히 평가하고 ‘페티쉬’라는 단어를 쓴 데 대해 크게 분노했다. 광범위한 의미로 해석하려 해도 글의 첫머리가 ‘나의 여자 보는 눈’이라는 표현이었기에 더욱 충격적이라는 것이다.
한 네티즌은 “평소 여자 보는 눈으로 재판받는 여학생들을 보고 있었느냐”며 “판사님이 깨달은 바가 무엇인지를 떠나서 표현하는 방식 자체가 잘못됐다”고 질타했다. 또 “자기 취향에 맞는 외모 관리를 훈계하다가 이것은 자신만의 페티쉬라는 걸 인지했다는 소리냐”며 “말하고자 하는 “잘못된 부분을 꼬집는 건 핑계고 본인 욕망을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이외에도 “소년재판부 판사가 하는 일이 외모와 옷차림 지적이 아니라는 건 본인도 아실 것 같다” “지금 뭘 보고 있는지 아득할 지경이다” “첫 문단만 읽었는데도 소름이 돋는다” “그럼 판사도 얼굴 보고 뽑자” 등의 댓글이 달렸다.
문지연 기자 jy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