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해운재건 5개년 계획’의 선봉장인 HMM(옛 현대상선) 소속 선원들이 대규모 파업을 예고했다. 400여명 한국인 선원이 타고 있는 41척 선박 대다수가 중지를 모았다. 임금인상을 둘러싼 갈등이 표면적 이유지만, 코로나19 최전선에서 분투하고도 제자리걸음인 처우에 대한 울분이 터져 나왔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HMM 해원연합노동조합(노조)은 지난 14일 사측이 제시한 내년 1% 임금인상안에 대해 중앙노동위원회에 노동쟁의 조정신청을 냈다. HMM은 경영난을 이유로 지난 6년(2015년 제외한 2013∼2019년)간 임금을 동결했다. 올해 임금 인상률은 1%였다.
노조는 쟁의 신청을 하며 성명을 내고 “선원들은 침몰하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파도를 넘어왔다. 이제 HMM은 정부 도움으로 기사회생해 연간 흑자 전환을 앞두고 있다”며 “적자가 날 땐 고통을 분담했더니 흑자가 나자 나 몰라라 하는 현실 앞에 회사를 떠나는 것, 선박을 버리고 떠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파업이 현실화하면 1976년 현대상선 설립 이래 선원들의 첫 쟁의행위가 된다.
코로나19 재확산 와중에 파업하는 것에 우려의 시선도 있다. 하지만 선원들이 부정적 여론을 감내하면서까지 피켓을 들고 목소리를 높여야만 하는 데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한진해운 파산 이후 망가진 한국 해운이 돌아왔다는 장밋빛 뉴스가 넘치지만, 정작 수출 최일선에서 고군분투 중인 선원은 코로나바이러스 정도로 인식되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전정근 HMM 해원연합노동조합 위원장에게 한국 선원들이 처한 현실을 들어봤다.
(정부는 2018년 4월 ‘해운재건 5개년 계획’을 세워 HMM의 초대형 컨테이너선 20척(2만4000TEU급 12척·1만6000TEU급 8척, 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 건조를 지원했다. 최인호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에 따르면 한국해양진흥공사의 지원금 6조5040억원 가운데 63%인 4조1280억원이 HMM에 집중 지원됐다. 코로나19가 만든 물동량 증가와 운임 고공행진이 더해져 HMM은 올해 2분기 2015년 이래 5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올해 영업이익이 8000억원대에 달한다는 전망도 나온다.)
-파업 이유는?
“직원들은 현대상선 시절부터 경영난 속에서 고통을 나눠왔다. 해상직원은 지난 6년간, 육상직은 8년간 임금을 동결했다. 그런데 이 기간 선원들의 업무는 배로 늘었다. 축구장 4배 크기인 2만4000TEU급 배가 나오고, 각종 해양환경 규제가 까다로워지면서 배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늘어났다. 길이 400m, 폭 60m 배 위에는 냉동화물 컨테이너가 1000개 가까이 실린다. 온종일 화물 상태를 살피고, 수리해도 시간이 모자란다. 무인도만 한 배 위를 구석구석 다니며 일한다고 생각해보라. 여기에 코로나19 확산으로 세계 대부분 항구에서 땅을 밟을 수도 없다. 예전에는 한 번에 평균 6개월쯤 배를 탔다. 그 기간 중간중간 항구에 들어갈 때마다 짧은 여행을 다녀오거나 관광을 하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할 수 있었다. 주말 없이 쉼 없이 돌아가는 선상생활의 거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코로나 확산 우려에 선원 교대도 힘들어져 꼬박 8개월 넘게 배에 갇히는 경우가 많다. 수감생활이라고 얘기하더라. 한 선원은 어린 딸이 영상통화로 ‘아빠, 왜 이렇게 안 와. 얼굴 까먹겠어요’라며 울먹이는데 너무 미안하고, 직업에 대한 자괴감마저 느꼈다고 한다. 8개월 넘게 가족과 생이별을 감수하는 데다 항구에서는 배에서 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사실 HMM은 전체 매출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2.3% 수준이다. 선원들만 놓고 보면 1% 정도다. 인력 효율이 굉장히 높은데 이 돈을 아껴 빚만 갚으려 한다.”
-파업이 현실화한다면?
“배를 묶거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다. 400여명 한국인 선원이 타고 있는 41척 배 가운데 39척에서 사측을 규탄하는 사진을 보내왔다. 이들은 현재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배가 우리나라로 돌아오면 파업에 차차 합류할 예정이다. 선원법에 따라 운송 중인 선박 위나 해외에서 파업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물류대란이 일어나 임시선박을 긴급투입하는 상황에서 배 한 척이 묶이는 손해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선원들도 회사나 국가에 피해를 주려는 게 아니다.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해 달라는 얘기다. 최근 HMM은 배가 없어 수출화물을 못 보내는 중소기업을 위해 임시선박을 긴급투입했다고 홍보했지만, 정작 배를 움직이는 선원들에게는 고생한다는 얘기 한마디 없다. 정부도 수출화물을 잘 보내는 것만 생각할 뿐 그 속에 있는 사람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우리 경제 상황이 안 좋아도 수출이 선방하는 데는 선원들의 역할이 크다.”
-사측 입장은?
“여론을 의식해 단계적으로 올리자고 한다. 급여 인상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올해 1%, 내년 1% 인상 등 이런 식으로 꾸준히 올리자는 입장이다. 또 올해 흑자 기조가 내년까지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고, 상환할 빚이 3조원이 넘는 상황에서 급격한 급여 인상은 어렵다고 얘기한다. 채무를 상환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선원들이 하도 지쳐 사표를 쓰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보상을 현실적으로 해 달라는 게 해상직원들의 요구다.”
-단순히 임금 문제만이 아니다?
“HMM과 한국 해운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반가운 뉴스 속에는 선원들의 희생도 숨어있다. 배만 있고 선원이 없으면 누가 황천항해(악천후 항해)를 뚫고 화물을 운반할까. HMM에 정부 지원금이 투입돼 정부 기관처럼 되어버린 게 사실이지만, 사측은 그걸 기화로 ‘정부가 이만큼 살려줬으니 너희는 일만 하라’는 식으로 나온다. ‘물에 빠진 놈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거냐’고도 한다. 그게 경영을 잘못한 회사가 할 얘기는 아니지 않나. 물에 빠진 놈이 아니라 회사가 침몰해가는 상황에서까지 운명을 함께한 건데 회사는 선원들을 파트너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안타깝다. 특히나 코로나19 최전선에서 세계 각국에 수출물자를 수송해 오고 있는데 언론 보도 속에서도 이런 얘기를 찾아볼 수 없다. 선원은 고작 부산항에서 몇 명이 확진됐다는 뉴스의 주인공일 뿐이다. 해운재건의 숨은 주인공들을 바이러스 취급하는 셈이다. 이런 대우를 받는 데 누가 신나게 일하고 싶을까.”
-HMM은 정부 해운재건 5개년 계획의 가장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 올해는 장밋빛 전망과 기사들도 넘친다.
“과거를 돌아보면 아이러니하다. 20여년 전 현대상선이 선박의 종류를 다각화하며 사업을 확장할 때, 정부는 기업들에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맞춰 달라’고 요구했다. 부족한 외환을 확보한다는 목적이었다. 배를 빌려 쓰는 일이 많은 해운업은 다른 산업보다 부채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는 특성이 있는데 천편일률적인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결국 당시 현대상선은 정부 요구에 따라 알짜 사업인 자동차수송선사업부를 유코카캐리어스에 팔아넘겼다. 유코카캐리어스는 지금까지 안정적인 수익을 내고 있다. 이후 정부는 조선업 활성화 명목으로 해외 선사에 금융비용 지원 등 온갖 혜택을 주며 몸집을 키우는 길도 열어줬다. 당시 ‘계약서에 사인할 볼펜 한 자루만 가져오면 선박을 건조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때부터 국내, 해외 선사들의 격차가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국적선사인 한진해운, 현대상선은 대형 외국 선사가 주도하는 치킨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랬던 정부가 2017년 한진해운 파산 이후, 물류대란을 겪자 그제야 해운재건을 위해 현대상선을 살리려 한 것이다. 결국 해운을 죽인 것도 정부고, 살린 것도 정부다. 원망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는 역설적 상황이다. 해운업계에 병을 준 뒤, 과오가 미안해 약을 주는 기분마저 든다.”
-문 대통령의 넷째 동생은 해양대학을 졸업한 화물선 선장이다. 대통령 자신도 배와 선원들을 쉽게 볼 수 있는 부산 영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다른 지도자들보다 바다의 가치를 더 잘 알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문 대통령이 한국해운 재건을 위해 해양진흥공사를 설립하고, 물질적 지원에 최대한 노력한 부분은 높게 평가하고 감사하다. 하지만 선원의 중요성을 잘 알고 계실 것이기에 아쉬움이 큰 게 사실이다. 선원은 갈수록 뒷전으로 밀리는 기분이다. 정부에서는 택배 화물을 실어나르듯 물류만 잘 돌아가게 해줄 정도의 역할만 기대하는 것 같다. 특히 선원들은 근로기준법이 아닌 특별법인 선원법 적용을 받는다. 근로기준법이 발전하는 동안 선원법은 거의 정체돼 오히려 악법이 된 상황이다. 정부에서 해운재건과 함께 조금이나마 선원들을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일각에서는 코로나 국면에서 파업이 합당하냐는 지적도 나온다.
“우려가 되긴 한다. 자영업자들이 폐업하고, 모두가 어렵다. 하지만 망망대해 위에서 선원들은 언제까지 고통 분담만 강요당해야 하는 걸까. 비난 여론을 감수하더라도 이번만큼은 의지를 보여주자는 의견이 많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파업으로 국가 경제에 손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라 선원의 노고를 알아 달라는 게 더 크다. 묵묵히 일한 것밖에 없는 이들이 왜 경영난에 대한 책임을 다 지고 계속 대역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나. 상황이 개선되고 있다면 그 역할도 함께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거다.”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