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잃은 죄책감에 세상 등진 소방관, 국립묘지 안장된다

입력 2020-12-15 16:56
고 정희국 소방위(왼쪽)와 고 강기봉 소방교의 생전 모습. 소방청·울산소방본부 제공.

구조구급 활동 중 동료를 잃고 3년간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으로 고통받다 지난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울산소방본부의 정희국(당시 41세) 소방위가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15일 울산소방본부에 따르면 국가보훈처는 고(故) 정희국 소방위의 국립묘지 안장을 승인했다. 정 소방위의 유족이 지난 10월 28일 국가보훈처에 국립묘지 안장 신청을 하고, 울산 소방이 필요한 증빙 자료를 제공한 것에 따른 것이다.

정 소방위는 현재 울산 한 공원묘원에 안장돼 있으며, 내년 봄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될 것으로 전해졌다. 정 소방위는 앞서 11월 6일에는 국가보훈처로부터 국가유공자로도 등록됐다. 직무 수행 중 사망이 아닌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 국가유공자로 인정된 사례는 소방에서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울산 소방은 설명했다.

지난 5월 인사혁신처도 정 소방위에 대한 위험직무순직을 인정한 바 있다. 당시 인사혁신처 공무원재해보상심의위원회는 정 소방위가 동료를 잃은 뒤 극심한 심적 고통을 겪는 등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오랜 기간 치료를 받아왔다는 점에서 구조 활동이라는 위험 직무가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8월 5일 정희국 소방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하루 뒤 그의 사물함을 열자 3년 전 임무수행 중 사망한 후배 강기봉 소방사의 근무복이 걸려 있었다. 울산소방본부

정희국 소방위는 지난해 8월 5일 숨졌다. 하루 뒤 그의 사물함에 3년 전 사망한 후배 강기봉(당시 29세) 소방사의 근무복이 걸려 있는 것이 발견됐다.

정 소방위가 사망하기 3년 전인 2016년 10월 5일 울산시 온산119안전센터 소속 정희국 당시 소방교와 강기봉 소방사는 태풍 ‘차바’로 인한 집중호우로 고립된 주민을 구조하러 출동했다. 이들이 탄 구급차가 막 울주군 청량면 양동마을 앞을 지날 때 마을 주민이 황급히 뛰어와 “회야강변 고립된 차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구조를 요청했다.

정 소방교 등은 구급차에서 내려 고립된 차로 뛰었다. 쏟아진 빗물은 어느새 무릎 높이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차에 가보니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불어난 물은 순식간에 허리까지 차올랐다. 정 소방교는 전봇대의 쇠로 된 손잡이를 잡았다. 강 소방사는 바로 옆 쇠로 된 가로등에 몸을 의지해 버텼다.

강 소방사는 “선배님 저 더는 힘들어서 못 잡고 있겠어요”라고 외쳤다. 정 소방교는 이 말을 듣고 함께 자신은 좀 더 견딜 수 있었지만, 함께 물에 뛰어들었다. 정 소방교는 휩쓸려 들어갔다 떠오르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 약 2.4㎞ 하류에서 튕겨 나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강 소방사는 1㎞ 정도 더 떨어진 곳에서 결국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정 소방교는 소방장이 됐다. 정 소방위는 잘 견디는 듯 보였지만 사망 후 남긴 쪽지에는 그가 얼마나 고통의 시간을 견뎌왔는지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숨진 정 소방위의 차 안에서 A4용지 1장 분량의 쪽지가 발견됐다. 강 소방사가 죽은 지 8~9개월쯤 뒤 쓴 글이었다.

정희국 소방장이 후배인 강기봉 소방사를 잃은 8~9개월쯤 뒤 함께 죽지 못한 슬픔을 토로한 메모형식의 쪽지. 정 소방장은 이 쪽지를 자신의 차량에 넣고 다녔다. 울산소방본부 제공

쪽지에는 “나는 너무 괴롭다. 정신과 치료도 약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버텨왔다. 같이 살고 같이 죽었어야만 했다(후략)”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의 휴대폰에도 A4용지 24장 분량의 글이 남아 있었다. 그가 부친상을 당한 뒤 49재가 끝나는 지난해 6월 23일부터 25일까지 쓴 글이었다. 그 글에는 3년 전 강 소방사와 함께 출동해 당한 사고 내용과 이후 힘들었던 순간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울산 소방은 지난달 9일 제58주년 소방의 날을 맞아 정 소방위에게 옥조근정훈장을 추서했다. 울산 소방 한 관계자는 “정 소방위의 국가유공자 등록과 국립묘지 안장이 이뤄져 울산 소방 공무원들이 마음에 있던 짐을 그나마 덜게 됐다”며 “그동안 모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는데 좋은 결과가 나와 감사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