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석이 살려낸 주호영의 ‘26분’

입력 2020-12-15 05:30 수정 2020-12-15 05:30
89시간 5분. 지난 9일부터 6일간 진행된 국회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는 14일 마침표를 찍는 순간까지도 순탄치 않았다. 당초 국민의힘이 초선 의원들을 앞세워 필리버스터에 나섰지만, 거대 의석을 앞세운 더불어민주당은 토론을 강제 종료시켰을 뿐 아니라 야당 원내대표의 발언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으며 철저히 야당을 무력화시켰다. 이에 격앙된 야당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자칫 볼썽사나운 상황까지 갈 뻔했으나 박병석 국회의장의 중재로 가까스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박병석(오른쪽) 국회의장이 14일 국회 본회의에서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에 대한 무제한 토론 종결 찬반투표를 앞두고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불러 중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은 이날 대북전단살포 금지 내용을 담은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의 마지막 발언자로 주호영 원내대표를 내세웠다. 180석 거대 의석을 앞세운 범여권의 입법 독주에 야당 원내대표가 마지막으로 항의하며 필리버스터를 마무리하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직전 토론자인 이재정 민주당 의원은 토론 중단 표결 예정 시간인 8시50분까지 5시간 33분 동안 발언을 이어갔다. 이 의원은 “오늘 제가 마무리를 하게 됐다”며 주 원내대표의 발언 기회를 끝내 허용하지 않았다.

국민의힘은 이날 저녁 7시쯤 박 의장에게 2~3시간의 발언 시간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박 의장은 여야 교섭단체 대표 간 협의 없이 일방적인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난색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당도 이미 토론 종결 표결 시간이 된 상황에서 발언 기회를 주는 것은 원칙이 무너지는 것이라며 반대했다고 한다.

이 의원의 시간 끌기로 원내대표가 발언 기회마저 얻지 못할 상황이 되자 야당 의원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여야 원내지도부는 의견을 교환했지만 주 원내대표의 발언 시간을 1시간으로 할 것이냐, 40분이냐, 30분이냐를 놓고도 치열한 감정싸움을 벌였다.

민주당은 이 과정에서 주 원내대표에게 발언 시간을 주는 대신 토론 종결 표결 없이 마무리할 것을 요구했다. 국민의힘이 거부하면서 좀처럼 절충안을 찾지 못했다. 더구나 토론 종결 표결은 21대 국회에서 처음 진행돼, 선례가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박 의장이 여야 원내대표를 세 차례 단상 앞으로 불러들여 설득한 끝에 30분의 발언 시간을 주고, 30분이 넘으면 토론 종결 표결을 하는 것으로 중재를 끌어냈다. 박 의장은 “교섭단체 협의에 따라 마지막으로 주 원내대표에게 30분간 토론을 하도록 하겠다”며 어수선한 회의장을 수습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14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대북 전단을 금지하는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에 대해 반대하는 무제한 토론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단상에 오른 주 원내대표는 “발언 시간 30분을 얻기가 이렇게 힘든 필리버스터를 할지 말지 참으로 참담하다”며 울분을 쏟아냈다. 주 원내대표는 “민주당 여러분들 180석으로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정말 마음이 개운하냐”며 “(국회의원 임기) 4년 짧게 지나간다. 권력을 잡았을 때는 무서운 게 없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주 원내대표는 이날 26분간 문재인정부와 민주당의 독주 행태를 비판하고 내려왔다. 이어 10시쯤 재적의원 188명 중 찬성 187표, 기권 1표로 대북전단살포금지법 필리버스터 종결 동의안을 의결했다. 전날 국정원법 필리버스터 종결 투표에 불참한 정의당(6명)도 이날은 표결에 참여했다.

곧이어 진행된 법안 표결에선 187명이 투표해 전원 찬성으로 통과됐다. 이 법안은 군사분계선(DMZ) 인근에서 대북 전단을 살포하거나 확성기 방송을 하는 경우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 벌금으로 처벌토록 한다. 이로써 지난 9일 이후 여야 의원 총 21명이 89시간 5분(정회시간 제외) 동안 진행한 필리버스터는 마무리됐다.

박병석 국회의장이 14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무제한 토론 종결을 알리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은 본회의 종료 뒤 규탄대회를 열고 여당의 입법 독주를 강하게 성토했다. 배현진 국민의힘 원내대변인은 “이재정 의원 다음 주자가 주 원내대표라는 사실이 알려진 뒤 민주당 원내대표와 원내수석 등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됐다. 토론 종결 표결이 임박해 본회의장에 양당 모든 의원이 입장한 후에야 원내지도부가 만날 수 있었다”며 “민주당이 상대 당에 대한 최소한의 도의마저 저버린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는 본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주 원내대표에게 발언할 기회를) 줬다”고 짤막하게 답했다.

양민철 김동우 기자 lov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