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 K리그 명문 수원 삼성은 강했다.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전역 최고의 팀들이 모이는 무대에서 그들은 매 경기 당당하게 싸워 무서운 상대를 연거푸 이겨냈다. 불과 몇달 전 1부 리그 잔류조차 장담 못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가장 높은 곳에 이르진 못했지만, 온몸을 던져 싸운 수원 선수단에는 수원뿐 아니라 축구팬 모두의 박수와 찬사가 쏟아졌다.
수원은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대회가 열린 카타르로 향할 때만 해도 부상자가 속출한 탓에 다음 시즌 준비에 더 무게가 실리는 듯했다. 그러나 수원은 박건하 감독 지휘 아래 기대 이상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K리그 대표 명문의 자부심을 되살렸다. 박 감독은 대회 일정을 마친 뒤 지난 11일 귀국해 자가격리된 채 한숨을 돌리고 있다. 그는 14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힘들었을 수원 팬들이 ACL 경기에 위로를 받았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뜻밖에도 극적인 결말
사실 수원이 ACL에서 선전하리란 시선은 많지 않았다. K리그 득점왕 출신 타가트와 수비 중심축 헨리가 부상을 이유로 전력에서 제외됐고, 크르피치는 계약만료로 이탈해 외국인 선수가 전멸했다. 주장 염기훈이 지도자 연수로 빠졌고 1부 잔류의 축이던 공격자원 한석희도 부상으로 합류하지 못했다. 김건희는 안고 있던 근육 부상이 카타르에서 더 심해졌다. 박 감독은 “출발 당시만 해도 결과를 장담하기는 어려웠다”면서 “첫 경기(광저우 헝다전)에서 지면 가망이 없으니 어린 선수들을 데려가 경험을 쌓게 해줄 계획이었다”고 털어놨다.
반전은 극적이었다. ACL 2회 우승에 빛나는 광저우를 두 차례 무승부로 잡아낸 데 이어 비셀 고베에 2대0 완승하며 16강 토너먼트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16강전에서는 지난해 J리그 우승팀 요코하마 F. 마리노스를 극적인 역전승으로 눌렀다. 마지막 8강전에선 전반 김태환이 퇴장하고서도 승부차기까지 고베를 끌고 간 끝에 아쉽게 탈락했다. 결과도 기대 이상이었지만 역동적인 경기력과 모든 걸 다 내건 듯한 선수들의 열정이 아시아 팬들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조별리그 당시 좀체 표정이 없던 박 감독은 16강을 통과하고 나서야 현지 기자단에 처음 웃음을 보였다. 애초 전력으로 세운 첫 목표를 이뤘기에 나온 안도의 미소였다. 박 감독은 “기존 베스트 멤버 중에서도 ACL은 처음인 선수들이 좀 있었다. 그럼에도 선수들이 광저우 수준의 팀과 좋은 경기를 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며 만족을 나타냈다. 그는 “16강을 지나면서는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겠다고 여겼다. 속으로는 솔직히 우승도 한 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면서 “고베전(8강전)에서 퇴장이 없었다면 충분히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예상외의 선전에 오히려 박 감독이 미안함을 느껴야 했던 선수도 있다. 토너먼트에 접어들면서 매 경기가 예상보다 긴박하게 돌아간 탓에 베스트 멤버를 대회 내내 고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국제무대 경험을 쌓게 해주려 데려간 고교생 신분 준프로(프로 계약 전) 선수 두 선수 중 손호준에게 기회를 못 준 걸 특히 아쉬워했다. 그는 “요코하마전에서 손호준을 교체할 준비까지 다 마쳤는데 상대가 3대2로 추격해와 넣지 못했다.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더 성장한 수원, 그리고 박건하
수원의 선전은 카타르 현지에서 여유를 가지고 발을 맞춰볼 시간이 생긴 덕분이기도 했다. 말레이시아팀 조호르 다룰 탁짐이 대회 불참을 선언하면서 조별리그 일정이 여유가 생겼다. 리그에서 잔류에 집중하느라 정작 팀워크를 다지긴 힘들었던 수원에 좋은 기회였다. 박 감독은 “적응하고 훈련할 시간을 벌어서 다행이었다”면서 “제가 오면서도 그랬지만 선수들의 훈련 집중력이 굉장히 높았다. 그런 점이 경기에도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수원에게는 ACL이 팀으로서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이번 대회는 박 감독 개인에게도 귀중한 기회였다. 현역 선수 시절에는 자주 ACL에 나섰지만 지도자로서는 이번이 첫 경험이라서다. 그는 “선수들도 저도 ACL을 치르며 발전했다고 느낀다”면서 “감독으로서 국제대회를 치렀다는 점도 중요할 뿐 아니라 단기전을 운영하는 방법 등 많은 걸 배웠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리그에서 제가 부임한 뒤 선수들이 함께 앞에서부터 수비하고 공격하면 시너지가 얼마나 크게 나는지 느꼈을 것이다. 이번 국제무대에서도 마찬가지”라면서 “선수들이 함께하려는 게 저에게도 보였다. ACL에서 그런 점이 더 잘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선수 개개인의 성장도 빼놓을 수 없다. 수원 측면 유망주 김태환은 16강전 대회 데뷔골을 넣었지만 8강 고베전에서 퇴장당했다. 수적 열세 속에 수원은 분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부차기에서 탈락했다. 박 감독은 “큰 실수도 아니었기에 특별히 김태환한테 다른 말을 해주진 않았다. 얘기하면 정말 뭘 잘못했나 하고 생각할까봐서다”라고 말했다. 그는 “김태환은 더 성장할 거라 생각한다. 더 기량을 쌓고 발전할 것이란 기대가 크다”면서 “선수 자신도 그런(침울해하는) 성격이 아니라 낙담하지 않더라”면서 웃었다.
다른 팀 이적설이 돌고 있는 공격수 임상협은 이번 대회에서 수원을 위해 불꽃을 태웠다. 리그 경기에 거의 나서지 못해 다른 갈 팀을 알아보던 중이었지만 박 감독의 설득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박 감독은 “개인적으로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면서 “귀국 뒤 자가격리 등으로 이적이 어려울까봐 카타르행에 난색이었지만 가서 잘한다면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 설득했다. 한참을 고민 끝에 승낙하더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임상협은 대회 내내 대활약을 했다. 일정이 끝난 뒤 그는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에 ‘Happy Ending(해피엔딩)’이라고 적었다.
ACL의 선전, 팬들을 위로해줬길
박 감독은 “수원에서 뛴다는 건 자부심과 부담, 두 가지를 모두 느껴야 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워낙 과거에 쌓아놓은 명성이 대단하기에 선수나 감독으로서 짊어져야 하는 것도 많다는 의미다. 그는 “짧은 시간 동안 뚜렷한 결과를 내진 못했지만 수원의 자부심을 되찾는 데 이번 대회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면서 “자부심을 가지자, 자부심을 가지려 노력하자고 선수단에 당부해왔고 또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이번 ACL에서의 선전이 올 시즌 부진 탓에 유독 힘겨웠을 수원 팬들에게 위로가 됐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ACL에서 선수들이 최선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참 다행”이라고 말했다.
수원은 박 감독의 지휘 아래 다른 팀들보다 다소 늦게 다음 시즌 준비에 들어간다. 자가격리 기간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휴식기가 없다시피 한 터라 박 감독은 선수들을 걱정했다. 그는 “선수들이 격리 중이라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면서 “카타르에도 계속 갇혀있다시피 해서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박 감독은 “(다음 시즌) 어떻게 할 것이라 미리 장담하길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좋은 모습을 이어가고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긴 하다”면서도 “올해보다 낫고 발전한 모습 보여드리도록 선수들과 최선을 다하겠다. 지켜봐달라”고 팬들에게 당부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