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미국 퍼스트레이디인 질 바이든 여사가 스스로를 박사(Dr.)로 지칭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언론 기고문이 미국판 여혐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
13일(현지시간) 미 공영라디오방송(NPR), 영국 가디언 등에 따르면 전날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실린 문제의 기고문에는 즉각적으로 비난이 쏟아졌다. 가디언은 이 기고문을 성차별주의적인 기사로 규정했다.
대학강사 출신 작가인 조셉 엡스타인(83)은 지난 11일 WSJ 기고문을 통해 바이든 여사의 트위터 소개 문구를 트집 잡았다. 바이든 여사는 공식 트위터 계정에서 자신을 ‘질 바이든 박사(Dr. Jill Biden)’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 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엡스타인은 바이든 여사를 ‘얘야(kiddo)’라고 하대하며 시작한 글에서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문제 하나를 충고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당신의 이름에서 닥터 호칭을 내려놓을 수는 없나.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은 차치하고 마치 사기처럼 느껴진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바이든 여사가 교육학으로 학위를 받았다는 점을 거론하며 “한 현자가 말하길 아이를 받아본 사람(의사)이 아니라면 스스로에게 닥터라는 호칭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고 비꼬았다. 자신의 친구 중에는 명예박사 학위를 63개나 딴 사람도 있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엡스타인은 “질 바이든 박사라고 불리는 작은 황홀감은 이제 잊고 앞으로 4년간 세계 최고의 관사(백악관)에서 퍼스트레이디 질 바이든으로 살아가며 느낄 더 큰 전율에 만족하라”며 글을 끝맺었다.
바이든 여사는 지난 2007년 델라웨어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얻어낸 성취였다. 남편이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내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지 않고 일을 계속해왔다. 지난 11월 대선 전에는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자신의 직업인 대학교수 활동을 이어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가 미국 최초로 ‘일하는 퍼스트레이디’의 면모를 보일 것이라는 기대감도 조성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바이든 여사의 사회적 성취를 폄훼하는 엡스타인의 기고문에는 주말 내내 비난이 쏟아졌다. 여성혐오가 깔려있는 시대착오적 주장이라는 질타였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의 남편 더글러스 엠호프 변호사는 트위터를 통해 “바이든 박사는 고된 노력, 순전한 투지로 학위를 따냈다”며 “그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영감을 준다. 그가 남자였다면 결코 이따위 이야기가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고(故) 존 매케인 전 상원의원의 딸 메건 매케인은 “여성혐오 성향 남성들이 각종 매체에서 교육받고 성공한 여성들을 거론하는 방식에 대해 신물이 난다”고 말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그의 이름은 닥터 질 바이든이다. (엡스타인) 당신이나 그 이름에 익숙해져라”라고 질타했다.
엡스타인의 기고문은 특히 학계 여성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수십 명의 박사학위 소지 여성들이 바이든 여사와 연대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트위터 소개 글에 박사(Dr.) 호칭을 더했다. 엡스타인이 30여년간 재직한 것으로 알려진 노스웨스턴대학은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논란이 커지자 바이든 여사는 직접 트위터에 “우리는 우리 딸들의 성취가 폄훼당하지 않고 축하받는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