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취임사에서 “약속을 지키는 솔직한 대통령이 되겠다”며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다. 거짓으로 불리한 여론을 덮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군림하고 통치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화하고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집권 4년차 문 대통령을 바라보는 시선은 취임 초부터 강조했던 ‘소통’보다 ‘불통’에 방점이 찍혀있다. 반대편을 설득하기보다는 개혁의 정당성만을 강조하고,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갈등 현안을 중재하기보다 회피하거나 관망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게 비판의 핵심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간 충돌이 장기화되면서 ‘콘크리트’로 평가받던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도 30%대 후반으로 추락한 상태다.
여권은 문 대통령의 ‘불통’ 논란에 반론을 제기한다. 검찰개혁을 둘러싼 법무부와 검찰의 충돌의 경우 대통령의 개입은 되레 법치주의를 위협할 수 있고, 정쟁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집권 후반기에 들어선 문 대통령이 ‘40% 지지자만 바라보는 정치’에서 탈피해 국론 분열 사안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조언한다.
논란·쟁점에 나서지 않는 대통령
문 대통령은 갈등 현안이 불거질 경우 유독 핵심 쟁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거나 뭉뚱그려 말하는 경우가 잦았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당시 싱크탱크인 국민성장 토론회에서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나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폭력 사건이 터진 뒤 관련 언급을 하지 않았다. 결국 정세균 국무총리가 지난 7월 지상파방송에서 “걱정하는 국민께 송구하고, 피해자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대신 사과했다.취임사에서 야당을 국정의 동반자로 생각하고 수시로 만나겠다고 했지만 ‘협치’의 실패에 대해선 ‘공동책임’이라고 뭉뚱그렸다. 문 대통령은 지난 7월 21대 국회 개원연설에서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공동책임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 사태가 불거진 지난해 9월에는 “조 후보자 가족을 둘러싼 논란이 있는데 이 논란의 차원을 넘어서 대학입시 제도 전반을 재검토해 달라”며 대입 제도개선을 주문했다. 당시 뜬금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조 전 장관이 사퇴한 이후인 지난해 11월에는 “이번 기회에 검찰개혁의 절실함이 다시 부각되는 점이 한편으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여권, ‘불통’ 아닌 법치주의 지키는 것
여권에서는 대통령의 ‘불통’ 논란이 정치인보다 법률가에 더 가까운 문 대통령의 스타일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 문 대통령은 법과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매우 강하고, 이는 곧 법치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것이란 설명이다.문재인정부 청와대 출신 인사는 13일 “혼란스러운 정국을 대통령이 빨리 정리해야 한다는 바람은 알지만 아직까지는 대통령의 시간이 아니었다”며 “대통령이 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시간은 법무부 검사징계위원회가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결과를 발표한 이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과 원칙으로 정해진 과정을 대통령이라고 해서 뛰어넘는다면 대통령 스스로가 법치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며 “대통령은 더 좋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위해 국민들의 답답한 여론을 알지만 정말 무섭게 인내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친문 진영 일각에선 청와대 참모나 행정부 각료들의 책임으로 돌리기도 한다. 민주당의 한 친문계(친문재인) 의원은 “대통령이 원칙에 따라 미션을 줬으면 참모들이 적극적으로 총대를 메고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추·윤 갈등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가이드라인을 줄 필요가 없다”면서 “대통령이 나서서 두부 썰 듯 정리하는 게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절차적 정의·공정성 강조하는 청와대
청와대는 정치적 개입보다는 ‘절차적 정의’ ‘절차적 공정성’을 강조한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징계위 상황에 대해선 청와대가 뭐라 말 할 수 없다. 징계위가 끝나면 대통령이 재가를 하는 과정에서 할 말을 할 것”이라며 “그 전에는 개입할 일이 없다”고 했다.추·윤 갈등에도 침묵하던 문 대통령이 지난 3일 처음 꺼낸 말도 “절차적 정당성과 공정성”이었다. 청와대는 그러면서도 “징계 절차에 가이드라인을 줄 수 없다”며 구체적인 방법이나 진행 방안에 대해선 함구했다.
절차가 정당하게 진행된다면, 징계위 결정에 그대로 따르면 된다는 논리였다.
가덕도 신공항 논란을 대하는 청와대의 태도도 비슷했다. 동남권 신공항이 문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만큼 김해신공항 백지화 이후 대통령의 입장을 밝히라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총리실 검증위원회가 절차대로 조사했기 때문에 향후 대책은 총리 주재 관계장관회의에서 절차대로 하면 된다는 입장을 지켰다. 정해진 절차에 따르면 된다는 인식이다.
“갈등 조율 없다” vs “실패 반복 않으려는 것”
이 같은 문 대통령의 대응 방식에 대해 전문가들은 대통령이 국내정치 갈등 현안을 조율하지 않고 국가원수로서의 상징적인 역할에 그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치컨설팅 ‘민’의 박성민 대표는 “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과 달리 지지자들에게 욕 먹을 용기가 없어 보인다”며 “어차피 정치적으로 반대할 사람은 다 반대할 것이라고 보고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마저 떠나게 할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지금 문 대통령의 모습은 내각제에서 대통령이 하는 국가원수 역할만 하려는 것처럼 비춰진다”며 “불편한 얘기도 듣는 게 대통령의 역할인데 추 장관과 윤 총장의 갈등을 정리하지 않는 것은 소통의 문제라기보다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했다.문 대통령이 노무현정부가 실패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 한다는 시각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시 각종 현안이 불거질 때마다 전면에 나서 입장을 밝혔고, 이것이 되레 혼란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박상병 인하대 초빙교수는 “노무현정부는 온갖 설화에 묻혀 5년 내내 피곤했고 정권 재창출을 하지 못했다”며 “문 대통령은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고 공수처 등 성과를 만들어내면서 정권 재창출의 기반을 다지는데 모든 것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은 ‘대국민 설득’
문 대통령이 갈등 현안에 대해 사과하거나 책임을 지는 방식 또한 역대 대통령과 많이 다르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추·윤 갈등 이후 지난 7일 처음으로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입장을 밝히면서 “걱정을 끼쳐 송구하다”며 사과 형식을 취했다. 하지만 뒤이어 “민주주의와 개혁을 위한 마지막 진통이 되길 바란다”며 검찰개혁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기 보다는, 일단 지지층을 달래기 위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좀처럼 ‘내 책임’이란 표현을 쓰지 않는 문 대통령과 달리 과거 대통령들은 국론 분열 사태가 벌어졌을 때 대국민담화를 통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면서 국민 설득에 나섰다.
노 전 대통령은 2007년 4월 지지층의 반대가 극심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되자 대국민담화를 통해 “저 개인으로서는 아무런 정치적 이득도 없다. 오로지 소신과 양심을 가지고 내린 결단이다. 정치적 손해를 무릅쓰고 내린 결단”이라고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1년 대선공약이던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발표 관련 담화 후 질의응답에서 문책성 인사를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이 문제는 대통령에 출마한 후보인 이명박, 저에게 책임이 있지 내각이나 청와대는 책임이 없다”며 “제가 결단을 했기 때문에 내각이나 청와대에 문책성 인사는 없다”고 강조했다.
백상진 김판 이현우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