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 사찰’ 문제 지적 판사, 안건 부결에도 “대표들께 감사”

입력 2020-12-08 11:34 수정 2020-12-08 13:20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제기한 윤석열 검찰총장의 ‘법관 사찰 의혹’을 문제 삼았던 현직 법관이 법원 내부망에 ‘전국의 법관대표들께 감사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전날 열린 법관대표회의에서 법관 사찰 의혹에 대응하자는 안건이 부결됐지만, 공론화 과정을 거치면서 법원이 ‘살아있는 조직’임을 보여줬다는 취지가 글에 담겼다. 일선 법관들 사이에서도 법관대표회의 결론과 무관하게 ‘사법농단 의혹’ 사태를 거쳐 한층 성숙해진 법원 내부 모습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송경근 청주지법 부장판사는 8일 법원 내부망인 ‘코트넷’에 올린 글에서 “법관 사찰 의혹 문건에 대해 법관대표회의에 ‘원칙적인 의견 표명’을 요청했던 한 사람으로서 진지하게 논의해주신 전국의 법관 대표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소회를 밝혔다. 송 부장판사는 지난 3일 ‘전국법관대표회의에 간절히 호소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코트넷에 올리고 법관 사찰 의혹에 대한 대응을 촉구했다. 전날 온라인 화상 회의로 열린 법관대표회의에서 법관 사찰 의혹에 대해 대응하자는 안건은 원안과 수정안 2개가 모두 부결됐다.

송 부장판사는 “결론은 지난주 ‘의견표명 요청’ 글을 쓰면서 예상하는 대로 됐다”면서도 “법관대표회의의 모습이 ‘법관과 재판의 독립’이란 가치와 그 실현방법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을, 여러 측면에서 되새기고 상호 비교·검토해보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법원 안에 다양한 다른 생각들이 공존하고 있고, 그것이 공론의 장에서 토론을 통해 자율적으로 여과·조정·수용될 수 있는 건강함이 살아있는 조직임을 보여줬다”고 자평했다.

특히 송 부장판사는 “혹시라도 이러한 논의과정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 사이에 감정이나 반목이 생겼다면, 이제 다 털어버리고 서로를 비난하는 일은 삼가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의견표명 여부는 ‘생각의 차이’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한 것이다.

송 부장판사는 법관 사찰 의혹을 덮어두고 넘어가는 건 아니라는 점도 짚었다. 그는 “현재의 예민한 정치적 상황이 지나가고 이 문제를 보다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시기가 되면 ‘검찰이 업무상 필요로 판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그에 대한 통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하여 법관대표회의에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법원 내부에서는 송 부장판사의 글에 공감하는 반응이 나왔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위법 여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대부분 판사는 부적절하다고 보는 사안”이라며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바보처럼 눈치만 볼 순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다른 부장판사는 “사법농단 사태를 거쳐 법원이 한층 성숙한 것 같다”고 평했다. 지방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논의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며 “법관 정보 수집에 대한 논의 가능성은 앞으로도 열려 있다”고 강조했다.


<송경근 청주지법 부장판사 게시글 전문>

‘전국의 법관대표들께 감사드립니다.’

법관 사찰의혹 문건에 대하여 법관대표회의에 ‘원칙적인 의견표명’을 요청했던 한 사람으로서, 빠듯한 일정 속에서도 정식 안건으로 상정하여 진지하게 논의해 주신 전국의 법관 대표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결론은 제가 지난 주 수요일 밤 ‘의견표명 요청’ 글을 쓰면서 예상했던 대로 되었지만, 저는 위와 같은 법관대표회의의 모습이 ‘법관과 재판의 독립’이란 가치와 그 실현방법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을, 여러 측면에서 되새기고 상호 비교·검토해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법원 안에 다양한 다른 생각들이 공존하고 있고, 그것이 공론의 장에서 토론을 통해 자율적으로 여과·조정·수용될 있는 건강함이 살아있는 조직임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이러한 논의과정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 사이에 감정이나 반목이 생겼다면, 이제 다 털어버리고 서로를 비난하는 일은 삼가리라 믿습니다. 의견표명을 할 것인지 여부는 ‘생각의 차이’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현재의 예민한 정치적 상황이 지나가고 이 문제를 보다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시기가 되면, ‘검찰이 업무상 필요로 판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그에 대한 통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하여 법관대표회의에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우스갯소리 하나 할까요.

목요일 점심에 ‘의견표명 요청’ 글을 코트넷에 올린 후 그날 오후부터 금요일까지 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다양한 직종의 여러 지인들로부터 격려와 함께 저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전화, 문자메시지, 카톡 등을 받았습니다. 물론 제가 법조인이다 보니 그중 가장 다수는 법조인들이었는데, 전·현직 검사들로부터는 아무 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전·현직 검사들 중 저랑 꽤 친한 친구들도 여럿 있는데 말이죠. 매우 섭섭합니다^^

법관대표회의의 뜻을 깊이 존중하면서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저의 본분에 충실하겠습니다. 아울러 혹시라도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이란 가치가 훼손되지 않도록 저 자신도 늘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2020. 12. 8.

청주지방법원 판사 송경근 올림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