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싶었는데’… 성폭행 후 페북 친구 신청에 고소, 유죄 반전

입력 2020-12-06 11:27

“잊고 싶어서 묻어두려고 했는데, 2017년 페이스북 친구 신청이 왔다. 과거 일이 생각나 우울증 상담을 받기 시작했고, 사과를 받으려 메시지를 보냈는데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피해자 A씨가 가해자 김모씨에게 성폭행 당한 지 3년 만에 고소하면서 진술한 내용이다. A씨는 2014년 7월 지인의 집에서 김씨, 최모씨 등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성폭행 당했다. 김씨는 최씨가 만취한 A씨를 화장실에서 성폭행하고 나온 뒤 자신도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 A씨와 김씨는 당시 모두 미성년자였다.

A씨는 당시 곧바로 법적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최씨 등이 2017년 겨울 무렵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자신에게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하자 고소하기로 결정했다. 육군 부사관이 된 김씨는 아동·청소년성보호법 위반(준강간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군사법원에서 1·2심 재판을 받았다.

1·2심은 모두 김씨를 무죄로 판단했다. 김씨는 재판에서 A씨와 합의 하에 관계가 이뤄졌다며 혐의를 부인했고, 최씨가 A씨를 성폭행한 사실도 몰랐다고 했다. 김씨는 당시 A씨에게 “괜찮냐”고 물었고 A씨가 “괜찮다”고 여러 번 답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1·2심은 이를 인정해 “군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군사법원 판단은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아동·청소년성보호법 위반(준강간 등)으로 기소된 김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군사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6일 밝혔다. 대법원은 “원심은 합리적 근거 없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고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지적했다.

앞서 하급심은 “피해자가 ‘간음이 어떻게 시작됐는지의 상황’만 유독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며 김씨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당시 고등학생이던 A씨는 상당히 취한 상태였고 최씨에게 준강간을 당한 직후여서 김씨의 간음행위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일부 기억 못하더라도 진술이 비합리적이거나 모순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A씨가 김씨에게 “괜찮다”고 말한 것은 성관계에 동의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A씨의 “강간 피해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그냥 무슨 대답이든 괜찮다고 했던 것 같다”는 검찰 진술을 인정한 것이었다. 대법원은 “피해자의 ‘괜찮다’는 답변은 이미 정신적·육체적으로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형식적인 답변을 한 것에 불과하다”고 판시했다.

김씨는 평소 A씨와 호감이 있는 상태에서 연락을 주고받았고, 사건 직후 A씨를 집에 데려다줬다는 점도 무죄 근거로 들었다. A씨가 ‘어찌됐든 당신은 말리지 않았고, 나는 원치 않는 성관계를 당한 성폭행 피해자가 됐다’고 보낸 문자도 제시했다. A씨가 당시 김씨를 성폭행 가해자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피해자의 나이, 피고인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면 간음행위 이후 정황만으로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성폭행 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쉽게 단정할 수 없다”며 유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