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 피해자 “괜찮다” 말에 성관계…대법 “합의 아니다”

입력 2020-12-06 09:32 수정 2020-12-06 09:39
기사와 무관한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술에 취한 상태로 성폭행을 당한 뒤 “괜찮다”고 말하더라도 성관계에 동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준강간)으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군사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6일 밝혔다.

육군에서 하사로 복무하던 A씨는 2014년 7월 여고생 B양, 지인 C씨 등과 함께 지인의 집에서 술을 마셨다. B양은 술에 취한 상태로 화장실에서 C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이후 A씨는 화장실에 있던 B양에게 다가가 “괜찮냐”고 물은 뒤 ‘괜찮다’는 답변을 듣자 성관계를 했다.

재판 과정에서 A씨는 B양과 합의하에 관계가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B양이 “괜찮다”고 여러 번 답했고, A씨가 B씨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집 앞에서 서로 키스를 했다며 자발적인 성관계였다고 강조했다.

고등군사법원은 A씨 측의 주장을 대부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B양이 대부분 상황은 기억하면서 성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해서만 기억하지 못하는 점을 지적하며 진술에 모순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A씨가 B양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봤다. 또 B양이 성관계를 한 뒤 “괜찮다”고 해서 성관계에 동의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B양이 검찰에서 “강간 피해자가 되는 것이 무서웠고 피해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괜찮다고 한 것 같다”고 진술한 점에서, 당시 “괜찮다”고 한 언급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당시 고등학생이던 피해자가 술을 먹고 구토를 하는 등 상당히 취한 상태였다”면서 “상황을 일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의 진술이 비합리적이거나 모순된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B양의 고소 경위에도 특별히 의심할 만한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봤다. B양은 A씨로부터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받고 당시 일이 떠올라 우울증을 겪은 것으로 조사됐다. 그는 우울증 상담을 받은 뒤 A씨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사과를 받지 못해 A씨를 고소했다.

재판부는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격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판시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