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31일 마지막 ‘LoL 챌린저스 코리아(챌린저스)’ 경기가 펼쳐졌다. 서머 시즌 결승전, 어썸 스피어가 진에어 그린윙스를 3대 0으로 꺾고 최종 우승을 차지했다. 이 경기와 함께 챌린저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라이엇 게임즈가 내년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를 프랜차이즈화하면서 챌린저스를 없앤 까닭이다.
어썸 스피어는 마지막 챌린저스 우승팀으로 남았다.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들의 우승엔 풍부한 희로애락이 있었다. 어썸 스피어는 지난해 여름 ‘범사마’란 이름으로 처음 챌린저스 무대에 올랐다. e스포츠행사 대행업체인 ‘더플레이 스튜디오’의 강범준 대표가 이들을 끌어으면서 ‘스피어 게이밍’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올여름 어썸 e스포츠와 네이밍 스폰서 계약을 맺어 지금의 팀명을 갖췄다. 창단 후 세 시즌 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린 셈이다.
28일 서울 구로구의 한 건물에서 마지막 챌린저스 우승자들을 만났다. 어썸 스피어의 강범준 대표, 강범석 감독, 원거리 딜러 ‘프린스’ 이채환, 정글러 ‘크러쉬’ 김준서가 인터뷰에 응했다. 그들의 뜨거웠던 서머 시즌을 화톳불 삼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스프링 시즌 종료 직후 상체 전면 리빌딩
어썸 스피어는 ‘디스트로이’ 윤정민, ‘윈터’ 김요한, ‘탱크’ 박단원, ‘체이시’ 김동현, ‘프린스’ 이채환(당시 ‘재규어’란 소환사명 사용), ‘달카’ 박명준, ‘애스퍼’ 김태기, ‘쭈스’ 장준수로 로스터를 구성해 올해 스프링 시즌을 맞았다.
‘체이시’ 김동현과 이채환은 담원 게이밍과 계약을 맺은 상태였지만 강 대표가 담원 이유영 대표에게 부탁해 데려왔다. 이채환은 BBQ 올리버스와 담원에서 충분한 출전 기회를 받지 못해 실전 경기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터였다. 챌린저스팀 입단에 기꺼이 동의했다.
“담원에선 주전으로 활약하기 힘들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돈이나 팀의 명성보다는 경기를 치를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어요. 올해까지 후보 생활을 하면 프로 인생이 끝날 것 같았죠. 챌린저스를 부숴버리고 돌아오겠단 마인드로 스피어에 왔어요.” (이채환)
어썸 스피어는 스프링 정규 시즌을 4위로 마무리했다. 플레이오프에 나갔지만 팀 다이나믹스에 져 LCK 승강전 진출에 실패했다. 시즌 종료 뒤 탑라이너 윤정민과 정글러 김요한, 미드라이너 박단원이 팀을 나갔다. 순식간에 팀의 상체가 사라졌다.
강 대표는 우선 휴식을 취하고 있던 김준서에게 연락을 취했다. 당시 김준서는 러너웨이로 챌린저스 입성에 도전했다 실패한 상황이었다. 그는 한동안 ‘리그 오브 레전드(LoL)’를 손에서 놓고 있었다. 강 대표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을 때 그의 솔로 랭크 티어는 마스터 0점이었다.
“러너웨이 소속으로 챌린저스 예선전에 나갔다가 나인 테일에 져 떨어졌어요. 질 거란 생각을 못 했기에 멘탈이 박살난 상태였죠. ‘프로게이머를 계속하는 게 맞을까’하는 생각도 하며 한 시즌을 쉬었습니다. 그러다 강 대표님의 연락을 받고 팀에 합류했습니다.” (김준서)
강 대표와 강 감독은 김준서가 풍부한 경험을 살려 팀을 조율할 수 있을 거로 봤다. 이밖에도 김동현을 탑라이너로 포지션 변경시키고, 새 미드라이너로 ‘크로우’ 김선규와 ‘셉티드’ 박위림(2라운드 합류)을 데려왔다.
김동현의 포지션 변경은 급하게 이뤄졌지만, 단순히 궁여지책만은 아니었다. 강 감독은 “라인전과 1대1을 선호하는 김동현의 성향상 탑라이너가 어울릴 거로 봤다”고 밝혔다. 이들은 비슷한 성향을 가진 다이나믹스 ‘리치’ 이재원을 탑라이너 포지션 변경의 성공 사례로 여겼다고 한다.
기세 좋게 서머 시즌 돌입했지만 개막 3연패로 위기 봉착
어썸 스피어는 서머 시즌을 앞두고 스크림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선수단 내부에선 전승 우승을 목표로 하자는 얘기도 나왔다. 그러나 연습과 실전은 별개였다. 개막 후 3경기를 연달아 패배하면서 곧 팀 분위기가 침체됐다. 특히 김동현에겐 탑라인에서 버틸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강 감독과 이채환은 서머 시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3연패째를 기록했던 오즈 게이밍전을 꼽았다.
“동현이가 탑라이너로 나선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아트록스로 상대 카밀을 솔로 킬 따내길래 흐름을 타겠구나 싶었죠. 그런데 그게 끝이었어요. 8번을 연속으로 죽는 거예요. 보고 죽고, 보고 끌리고…. 일부러 죽는 수준이었다니까요. 그런데 그 경기가 분기점이었던 거 같아요. 그 경험을 밑거름 삼아 동현이가 좋은 선수로 발전할 수 있었어요.” (강범석 감독)
“저는 바로 다음 경기였던 그리핀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당시 저희가 8위, 그리핀이 7위였어요. 전승 우승을 달성하잔 얘기를 하며 시즌을 시작했는데, 어느새 꼴찌 멸망전을 하고 있더라고요. 감독님께서 그리핀전까지 지면 책임지고 팀을 떠나겠단 말씀도 하셨어요. 이 악물고 이기려 했고, 실제로 2대 0으로 승리해 다들 기뻐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김준서)
어썸 스피어는 7월3일 그리핀전을 시작으로 16세트, 9경기 연승을 달렸다. 캐리 1옵션은 바텀 듀오였다. 이채환과 장준수가 찰떡같은 호흡을 발휘하면서 팀의 경기력이 확연히 향상됐다. 두 선수는 매일 새벽 4시까지 듀오 랭크를 하며 실력을 키웠다. 이채환은 “그때 솔로 랭크에서 질 자신이 없었다. 그런 컨디션이 꾸준히 유지되니까 스크림에서도 기량이 발휘됐고, 그게 실전으로도 이어졌다”고 회상했다.
한 시즌을 쉬었던 베테랑 김준서도 금세 메타를 따라잡았다. 그는 LCK 동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담원 ‘너구리’ 장하권과 ‘쇼메이커’ 허수가 많은 도움을 줬다. 장하권은 그의 솔로 랭크 영상을 함께 보며 피드백을 도왔다. 허수도 정신적으로 흔들리던 김준서를 잡아줬다.
어썸 스피어는 여름 동안 피지컬이 뛰어난 탑라이너, 노련한 정글러와 미드라이너, 라인전부터 강력한 힘을 발휘한 바텀 듀오의 팀으로 성장했다. 10승4패를 거둔 어썸 스피어는 진에어(12승2패)의 뒤를 이어 2위로 정규 시즌을 마쳤다.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 오즈 게이밍을 꺾어 결승에 진출했다.
상대 전적 열세였지만 한발 빠른 티어 정리로 우승 일궈
결승전에서 만난 진에어는 어썸 스피어가 정규 시즌 두 번의 경기에서 모두 승점을 헌납한 상대였다. 어썸 스피어 선수단도 어려운 경기가 될 거로 예상했다. 시즌이 막바지로 향해 스크림을 잡기도 힘든 상황이었기에 강 감독과 선수들은 동남아 ‘퍼시픽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PCS)’나 중국 ‘LoL 프로 리그(LPL)’ 플레이오프를 보며 결승전을 준비했다.
어썸 스피어 선수단이 내린 결론은 ‘오른을 빨리 가져와야 한다’였다. 당시 해외 리그에선 탑라인에 탱커를 배치하는 전략이 유행했다. 이를 지켜본 강 감독은 탱커 중에서도 오른이 가장 좋은 픽이라고 판단했다. 공격적인 탑라이너의 대명사 ‘더샤이’ 강승록(IG)까지 오른을 고르는 걸 보고 그는 확신을 얻었다.
“정규 시즌 막판에 진에어와 붙었을 땐 칼챔피언으로 탱커를 뚫으려다 어려움을 겪었어요. PCS와 LPL 플레이오프를 보니 다들 오른을 1티어로 보더군요. 심지어 ‘더샤이’ 선수도 오른을 하는 걸 보고 ‘오른이 정말 좋은 챔피언이 맞구나’하고 확신했습니다. 결승전에선 오른을 먼저 가져간 게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강범석 감독)
선수들은 결승전 1세트를 역전승한 뒤 우승을 직감했다.
“솔직히 우승까지 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없었어요. 정규 시즌 때 진에어 상대로 다 졌으니까요, 실제로도 경기가 쉽진 않았고요. 하지만 동시에 후반 게임은 무조건 이길 수 있단 자신감도 있었어요. 결승전 1세트를 역전승한 뒤 우승을 예감했죠.” (김준서)
LCK 승격 없어 아쉽지만 각자 다른 내일 준비
예년 같았다면 LCK 승격도 노려볼 수 있었다. 그러나 LCK가 내년 프랜차이즈화를 선언하면서 승강전도 함께 사라졌다. 어썸 스피어 선수들은 “이미 승격이 없다는 걸 안 상태에서 치른 시즌이었기에 아쉬움은 없었다”면서도 “만약 승강전이 있었다면 LCK 승격도 충분히 노려볼 만했다”고 덧붙였다. 강 감독은 “우린 충분히 LCK로 올라갈 만한 실력과 팀워크를 갖췄던 팀이었다”고 말했다.
이제 어썸 스피어 선수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내일을 준비한다.
강 감독은 “LCK의 프랜차이즈화에 가려져 팀의 우승이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게 아쉽다”고 말했다. 이어 “잘하는 선수들이다. 다들 좋은 대우를 받고 좋은 팀에 갈 수 있게 돕는 게 현재의 제 목표”라면서 “그 이후에 제 거취도 정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이채환은 새로운 팀에서 ‘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우승을 목표로 하겠다고 말했다.
“저는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들려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가지만 첨언하자면, ‘쭈스’ 준수 형이 정말 잘하고, 열심히 하는 선수예요. 노안이어서 그렇지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아요. 저 때문에 챌린저스에서의 활약이 묻힌 느낌이에요. 더 많은 팀 관계자분들이 준수 형에게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잘하는 형이에요.”
김준서는 선수 생활 연장과 은퇴를 놓고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해외 지역의 팀에서 오퍼가 왔는데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가야 할지 고민 중이에요. 이번 시즌까지는 우승에 대한 열망이 컸는데, 팀이 프랜차이즈 심사에서 탈락하고 나니 저도 선수 생활에 대한 욕심이 사그라들더라고요.
아직 은퇴를 결심한 건 아니지만 코치로 변신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어요.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며 여러 코치, 감독님들과 함께했어요. 그분들께 배운 게 많아요. 채우철 감독님과 강범석 감독님, 김목경 감독님을 롤 모델로 삼으려 해요.
인복이 좋은 편이에요. 정말 열심히 노력해 성공한 동료들과 함께했어요. 하권이와 허수가 그랬고, 지금은 채환이가 그래요. 샌드박스 시절엔 ‘고스트’ (장)용준이나 ‘조커’ (조)재읍이 형처럼 좋은 사람들을 봐왔어요. 그들이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지켜봤어요. 그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해주고 싶어요.”
강 대표는 추억을 선물해준 선수들에게 고맙다고 전했다.
“어썸 스피어를 거쳐 간 선수들이 다들 좋은 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최후의 챌린저스 우승팀이란 걸 보다 많은 분께서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수들이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쟁취해낸 성과거든요.
이런 추억을 만들어준 선수들에게 고맙습니다. 정말 즐거웠던 2년이었습니다. 어썸 스피어를 운영했다는 건 제 평생의 자랑거리로 남을 겁니다. e스포츠업에 종사하다 보니 앞으로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 다들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