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원하던 임신 소식이 하필 임원 승진 직후에 찾아왔다. 최연소 여성 임원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감격에 기뻐할 틈도 없이 최고령 산모라는 또 다른 수식어를 부여받았다. 승승장구하던 회사에서는 금세 눈칫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더니 일에 집중 못 한다’는 이유로. 산후조리원에서는 더 큰 굴욕감을 맛본다. ‘이렇게 아이에게 관심 없는 엄마는 처음 본다’는 손가락질이 그를 향했다. 임신은 고달프고, 출산은 잔인하고, 회복의 과정은 구차한 이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여성의 삶을 현실적으로 담아낸 tvN ‘산후조리원’ 이야기다.
최근 종영한 ‘산후조리원’에서 최연소 임원에서 최고령 산모가 된 현진을 연기한 배우 엄지원은 최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동시대에 사는 평범한 여자의 성장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마련돼 기쁘다”며 “함께 울고 웃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산후조리원’은 현진이 산후조리원 동기들과 지지고 볶으며 성장해 나가는 격정 출산 느와르다. 2002년 MBC 드라마 ‘황금마차’로 연예계에 입문한 엄지원은 올해 데뷔 18년 차다. 드라마 ‘싸인’ ‘방법’, 영화 ‘소원’ ‘조작’ 등에서 굵직한 연기로 시청자와 만났던 그의 매력은 캐릭터에 자유자재로 녹아든다는 점이다. 전작 tvN ‘방법’에서는 불의에 성역을 두지 않는 투철한 정의감으로 무장한 열혈 반골 기자를 연기했고, 영화 ‘소원’에서는 성폭행으로부터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좌절감에 처절히 울분을 토하는 엄마로 변신했었다.
‘산후조리원’ 역시 엄지원에게는 도전이었다. 그는 “기존의 코미디가 아닌 스릴러, 느와르 등 다양한 장르적 재미가 있는 복합 코미디여서 좋았다”며 “시의성 있는 작품을 코미디로 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엄지원은 여성 배우도 입체적인 여러 캐릭터에 도전할 수 있는 지금의 환경이 반갑다고 했다. “여성이 서사를 끌어나가는 작품이 생긴 게 정말 몇 년 되지 않았어요. 저는 그 안에서 조금은 다른, 조금 더 주체적인 걸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늘 새롭고 재미있는 장르에 대한 갈증이 있어요.”
‘산후조리원’의 또 다른 의미는 16부작 관행을 깬 8부작 미니시리즈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점이다. “8부작은 처음이었어요. 기존 미니시리즈보다는 빨리 끝나서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드라마가 짧은 만큼 전개가 지루하지 않게 진행돼서 좋았죠.”
이 작품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 하나를 꼽으라면 ‘공감’이다. 전국의 엄마들뿐 아니라 아빠들까지 “아, 저거 내 이야기인데?”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극강의 현실감에 매료됐다. “바로 내 옆에 그리고 내 삶 속에 있는 이야기지만,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이야기라서 좋아해 주신 것 같아요. 물론 촬영하면서 출산이나 육아에 경험이 없으신 시청자도 좋아해 주실까 우려도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많이 사랑해 주셔서 기쁩니다.”
임신과 출산의 경험이 없던 터라 엄지원은 캐릭터 분석에 공을 들였다. 그는 “대본에는 ‘현진이 불편해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인다’라고 적혀있었는데, 지문 그대로 불편한 듯 연기할 수 있었지만 경험을 해본 지인들에게 어디가 불편한지, 어디가 아픈 건지 구체적으로 물어봤다”며 “출산 장면 같은 경우는 다큐멘터리를 참고했다”고 말했다.
외적인 부분도 여러 장치가 필요했다. 작품을 위해 4㎏을 증량했고, 만삭의 현진을 보여줘야 해 특수분장도 받았다. 그는 “출산 장면이 가장 힘들었다”며 “지금까지 했던 연기는 대개 보는 사람이 겪어보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진 같은 경우 많은 분이 경험하셨던 과정을 연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연기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전했다.
‘산후조리원’의 메시지는 이런 대사에 묻어난다. “제일 중요한 건 결국 나예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일 해요.” 현진은 ‘완벽한’ 엄마가 아닌 ‘행복한’ 엄마를 택했고, 육아휴직을 보류하고 회사로 향했다. 엄지원은 출산 후 “오현진의 인생은 끝났다”라는 대사와 함께 눈물이 툭 떨어지는 장면이 마음에 남았다고 했다. 하지만 출산을 했다고 해서 현진의 인생이 끝난 게 아니었다. 그는 워킹맘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고 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합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