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직으로 일하는 A씨는 올해 회사에서 감자와 옥수수를 삶고, 텃밭에서 상추를 뜯어오라는 등 상사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지시를 여러차례 받았다. 회사에서 밥을 해먹는 데 직원들이 요리를 해야한다는 이유에서다. A씨는 “작은 회사에서 차(茶)를 내어가는 일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아니지 않느냐”며 어이없어했다.
고단한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갑질로 인한 신음’이 연말까지 계속되고 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22일 ‘2020년 하반기 직장 갑질 30선 사례집’을 공개했다. 지난해 7월 16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고 1년 4개월이 지났지만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직장인의 호소는 끊이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상사의 업무 외 지시다. 직장인 B씨와 동료들은 퇴근 후 몇 시간에 걸쳐 피시방에 모여 유튜브 채널 편집 작업을 해야 했다. 부하직원을 동원해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만들겠다는 상사 때문이다. 채널 꾸미기에 동원되지 않은 직원들은 영상 찍어 보내기, 광고 만들기 등에 열중하는 상황이다.
매년 봄마다 회사에서 농사일에 차출되는 직장인도 있다. C씨는 원래 장애인 돌봄이 주 업무지만 최근엔 업무에서 배제된 채 옥수수 경작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는 김장철에는 배추 작업을, 옥수수 추수 때는 물건 강매까지 강요받았다고 한다.
인신공격성 발언도 좀처럼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직장인 D씨는 지난 7월 사장으로부터 “네가 이 동네에서 덩치가 제일 크다”거나 “천연두에 걸린 피부같다”는 외모 비하 발언을 공개적으로 들어야 했다. “여자는 결혼하면 (직장 일을) 그만둬야지”라는 성차별적 언행은 이미 일상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D씨가 다니는 회사는 5인 미만 사업장이라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적용조차 되지 않는다.
5인 미만 사업장 미적용과 원청의 갑질 등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의 제도적 허점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대책 마련 논의는 요원하기만 하다. 직장갑질119 권두섭 대표는 “여당 국회의원들이 법 개정안을 발의했는데도 정부와 여당이 소극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강보현 기자 bob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