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총장”…광주일고 동창 5명 대학 이끌어

입력 2020-11-19 05:20 수정 2020-12-08 18:12

“총장 1년쯤 하니까 복도에서 총장실이 어느 방향인지 겨우 알겠더라니까.” “이봐 막내 총장! 밥상머리 교육을 다시 받아야 되겠구만...”

장관급 의전에 익숙한 종합대학 총장들이지만 서로 아무 격식도 체면도 차리지 않는다. 이따금 던지는 농담 속에서 학창시절 그 때로 돌아가 아스라한 추억을 되새기는 여느 동창 모임이다.

고교 비평준화 시절 지역마다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몰리던 특정 명문고 출신이 지역 정·관계 요직을 차지하는 것은 다반사.

하지만 최고의 지성인을 양성하는 광주·전북권 총장을 같은 고교 동기생이 한꺼번에 맡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광주대 김혁종 총장과 전남대 정병석 총장, 조선대 민영돈 총장, 전북대 김동원 총장 얘기다. 이들은 모두 광주일고 제52회 졸업생이다.

고교친구 사이인 이들 중 김 총장을 제외한 총장 중 3명은 선거를 통해 선출됐다. 여기에 지난 2010년 10월부터 2018년 말까지 총장을 지낸 호남대 서강석 전 총장을 더하면 무려 고교 동창생 5명이 총장 명함을 가진 셈이다.

총장의 연륜은 창업·취업 중심대학을 표방하는 광주대 김 총장이 가장 많이 쌓았다. 지난 2003년 5월부터 광주대를 이끌어 온 김 총장은 누구나 인정하는 지역의 마당발이자 재담가다. 풍부한 지식과 경험담을 곁들여 대화를 주도한다.

2008~2009년 2년 임기에 이어 2019년부터 지난달까지 광주·전남대학총장협의회 회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 법무부 감찰위원회 위원과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 자문위원 등 경력도 화려하다.

3선 국회의원을 지낸 고 김인곤(1928~2004.4) 설립자의 장남인 그가 이끄는 광주대 교수채용의 공정성과 투명성은 교수사회에 정평이 나 있다.

뒤를 이어 2017년 2월 선출직 총장에 오른 것은 전남대 정 총장. 마지막으로 전북대 김 총장과 조선대 민 총장이 지난해 2월과 12월에 각각 직선제를 거쳐 총장 반열에 올랐다.

내년 2월 임기를 마치는 정 총장은 5·18민주화운동의 현장인 전남대에 ‘민주길’을 조성해 군사정권 시절 민주·인권·정의를 지킨 대학 구성원들의 자부심을 높였다.

전국국공립대학교 총장협의회장과 해양수산계 국립대 총장협의회장 등을 맡고 있다.

전북대 김 총장과 조선대 민 총장은 임기 2년 차를 맞아 학내 구성원들의 화합을 토대로 대혁신에 몰입해 큰 성과를 내고 있다. 전북대 김 총장은 서울대에 이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공학 석사. 일본 후카이도 대학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실력파다.

전북지역 산학협력단 협의회장, 전국거점국립대학산학협력단협의회 부회장, 대한산업공학회 호남지회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위암학회장을 역임한 민 총장은 포브스 코리아가 선정한 대한민국 100대 명의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들 총장들은 정기적 모임을 갖고 대학발전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때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교시절로 돌아가 추억을 더듬는다.



“아마 1975년일거야. 영돈 총장이 유신반대 시위로 2학년 때 퇴학당하자마자 검정고시 치르고 의대 갔지. 그러더니 양복 입고 긴 머리에 구두까지 신고 찾아와 대학 가려면 공부 열심히 하라고 짖굿게 놀렸지?”(광주대 김 총장) “1학년 때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옛 전남도청 앞까지 진출해 최루탄 가스 몽땅 마셨잖아. 운동화가 벗겨진 줄도 몰랐고 말이야.”(정 총장).

“그렇지, 조선대 교수이시던 아버지가 데모만 한다고 그때 책을 전부 태워버리셨어. 우리 집안의 분서갱유 사건이지. 하지만 난 분명히 대학은 76학번이니까 엄연히 선배 대접받아야 맞는 거 아닌가” (민 총장) “그러고 보니 민 총장도 김 총장처럼 대를 이어 조선대 교수를 했구만”(전북대 김 총장)

“광주일고하면 아무래도 야구 명문 아니겠어. 민 총장은 사실상 야구부 응원단장이었잖아. 하얀 장갑 끼고 응원가 선창하고 대단했어...”

까까머리 시절인 중학교 동창 사이이기도 한 광주대 김 총장과 전남대 정 총장의 대화는 언제나 유쾌하다. 대학운영에 관해 격의 없이 조언을 주고받을 때도 많다. 대학 시절에도 자주 만나 얘기꽃을 피우던 두 총장은 이로 인해 서로의 연애사까지 훤히 꿰뚫는다.

“정 총장은 둥근 공을 가지고 하는 것은 천재야. 대학 때부터 당구 실력이 아마 400~500쯤 되지. 배구 농구 골프까지 도무지 못 하는 종목이 없어..”(광주대 김 총장).

“김 총장이 두 사람이라 남들이 ‘김 총장님’ 하고 부르면 헛갈리잖아. 서로 좀 떨어져 앉지 그래. 그렇다고 전부 박사인데 김 박사하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정 총장)

전남대 정 총장과 함께 전북대 김 총장, 호남대 서 전 총장은 서울대 동문이다. 광주대 김 총장과 호남대 서 전 총장은 또 미국 일리노이 유학 시절을 같이 보냈다.

‘유학 선배’ 김 총장은 1년 늦게 미국 유학을 온 서 전 총장을 ‘픽업’하기 위해 오헤어 공항까지 왕복 10시간을 운전하고 대학원 입학 절차를 직접 밟아주기도 했다. 기숙사 배정과 짐 정리까지 김 총장이 도맡았다. 김 총장과 서 총장의 미국 유학 이야기는 끝이 없다.

“전 법무부 장관 김현웅이랑 정 총장이 서울 하숙집에서 같이 살 때 우리가 명동에서 만나면 밥값은 주로 내가 냈지. 아마”(광주대 김 총장)

“성균관대 다니던 혁종 총장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대장 노릇 하잖아. 지금도 자네는 직업이 총장이지만 난 보직이 총장이야. 우린 임시직이야. 언제 잘릴지 몰라, 그래도 우리는 똘똘 뭉치기 좋아하는 1958년 개띠들이니까 우정 영원히 변치 말자고...”(민 총장).

6개 번호가 모두 일치하는 로또 당첨은 814만 5060분의 1. 벼락 맞을 확률은 428만 9651분의 1.

씨줄과 날줄처럼 길흉이 교차하는 게 인생인데 살다 보면 우연이 필연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필연이 우연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가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할 만큼 힘든 일이 성사될 때도 있다.

동문수학한 친구 4명, 직전까지 포함하면 5명의 고교 동창이 종합대학 총장으로서 나란히 후학들을 가르친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게 확실하다.

이들은 국책사업 선정 등을 놓고 경쟁할 때는 치열하게 샅바 싸움을 벌이지만 지역사회의 리더로서 지역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데는 결코 소홀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이색적인 ‘총장 전성시대’를 연 이들 주인공은 “학령인구 고갈로 대학이 어느 때보다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대학교육 발전을 위해 각 대학 총장으로서 언제든 힘을 합치자”고 의기투합하고 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