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구단에 ‘과격 행동 방지’ 공문 보낸 연맹…불붙은 배구판에 찬물?

입력 2020-11-17 16:35
흥국생명 김연경(왼쪽)이 15일 김천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 한국도로공사와의 경기에서 서브를 넣기 위해 자리를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배구연맹(KOVO)이 김연경(흥국생명) 관련 논란 이후 각 구단에 ‘과격한 행동 재발방지교육 요청’ 공문을 보낸 걸로 확인됐다. 김연경의 행위가 ‘과격한 행위’인지에 대한 이견도 있을뿐더러, 한 선수의 행위에 대한 대처로 모든 선수를 교육하라는 선제적인 제재가 KOVO 이름으로 나온 것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자칫 선수들의 경기 몰입도나 팬들의 흥미를 반감시키는 대응이 될 수 있어서다.

김연경은 지난 11일 GS칼텍스전 5세트 14-14 상황에서 공격이 상대 블로킹에 막히자 네트를 잡아끌며 분노를 표출했다. 강주희 심판은 김연경의 행위가 퇴장감이 아니라 판단했고, 레드카드를 줄 경우 GS칼텍스가 1점을 더 얻어 경기가 심판에 의해 종료되는 걸 우려해 이에 대한 제재를 하지 않았다.

경기 후 KOVO는 강 심판에 대해 ‘잘못된 규칙 적용’을 사유로 제재금을 부과하는 결정을 내렸다. 더불어 김연경이 한 행위를 ‘과격 행동’으로 규정하며 V-리그 전체 구단에 ‘과격한 행동 재발방지교육 요청’이란 공문을 보냈다. 국민일보가 확보한 공문에 따르면 KOVO는 구단들에 “선수단을 대상으로 경기 중 과격한 행동방지를 위해 철저한 교육을 해주실 것”을 당부했다.

문제는 ‘과격 행동’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단 것이다. 강 심판은 “연맹이 심판들에게 (어떤 행동이 과격 행동인지) 분명한 룰을 제시해야 하는데 말해주지 않는다”며 “항의가 너무 많아 올해는 리그가 자빠질 판”이라고 토로했다. 실제로 다수 KOVO 관계자들은 ‘과격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 잣대를 설정해 제시할 순 없단 입장이다. 해당 행위가 발생한 상황과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과격행위로) 느끼는지’ 같은 요소들을 고려해 개별 사안에 대한 판단만 내릴 수 있단 것이다.

사람에 따라 ‘과격함’을 느끼는 기준이 다르다 보니 김연경 논란 이후 유독 선수 세리머니에 대한 불만이 거세게 표출되고 있다. 13일엔 최홍석(OK금융그룹)과 황택의(KB손해보험)가 서로를 쳐다보며 도발하는 듯한 세리머니를 하다 양 팀 선수들이 경기 뒤 충돌했다. 15일엔 로베르토 산틸리 대한항공 감독이 오재성의 웃는 듯한 세리머니에 반발해 항의하고, 장병철 한국전력 감독이 이에 대응하면서 모두 경고를 받았다. 같은 날 김종민 한국도로공사 감독도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 퇴장 당했다. 누구나 ‘과격함’을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되려 경기를 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과한 세리머니'로 인기를 모으기도, 뜻하지 않은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한 KB손해보험 노우모리 케이타. 연합뉴스

KOVO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모든 선수들을 대상으로 ‘재발방지교육’을 요구한 것 자체가 선수들을 위축시켜 최근 큰 관심을 받고 있는 배구 자체의 인기를 떨어뜨릴 수 있단 우려도 있다. 강 심판은 “심판이 있는 이유는 선수들에게 자유를 주되 선을 넘을 경우 제재하라는 것”이라며 “먼저 ‘하지 말라’고 하면 그건 규칙이 되는데, 멋진 플레이나 세리머니를 보여줘야 하는 선수들이 제재 받을까봐 위축될 수 있다. 흥국생명에만 교육을 당부하면 되지 왜 타 구단에도 공문을 보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국가대표로 국제대회에 출전했던 한 선수는 “외국에서 경기할 땐 코트 넘어가거나 멱살 잡지 않는 이상 제재를 하지 않는다”며 “솔직히 야구나 농구는 치고받고 클리어링도 하는데, 또 배구도 과거엔 더 심했는데 올해 유독 너무 (제재가) 강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스포츠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도 있는데 그게 없으면 팬들이 무슨 재미로 보겠나”라며 “왜 이 정도까지 논란이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한 구단 관계자도 “요즘엔 시대가 바뀌어 선수들이 환호하고 실망하며 자유롭게 감정 표현하는 걸 팬들도 좋아한다”며 “옛날 잣대만 들이미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밝혔다.

국제경기에서 ‘식빵’을 외쳤지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고, 오히려 팬들의 환호를 받았던 ‘식빵언니’ 김연경도 논란 이후 풀이 죽은 모습이다. 15일 도로공사전에선 파이팅 넘치는 모습을 잘 찾아볼 수 없었다. 김연경 측 관계자는 “김연경이 비매너 행위를 하려던 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것”이라며 “외국에선 선수들이 자책도, 표현도 하는데 한국에선 불편한 게 되니 어쩔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김연경이 평소 멘털이 강하긴 하지만 논란거리를 만들어 다운된 상태”라고 덧붙였다.

유근강 심판실장은 이에 대해 “김연경은 누가 봐도 과격한 행동을 했고, 한 편으로는 ‘김연경이니 봐주냐’는 말도 나온다”며 “앞으로 5라운드까지 가야 하는데 리그를 관리하는 입장에서 재발을 방지하고 경기를 규칙대로 운영하기 위해, ‘김연경은 되는데 왜 우린 안 돼’란 논란을 방지하기 위해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