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의 제재로 반도체 부품 조달이 막힌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가 결국 중저가 스마트폰 브랜드 ‘아너’를 매각하기로 했다. 아너가 떨어져나간 화웨이는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1위 경쟁(출고량 기준)을 해온 삼성전자에 한동안 밀릴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업계에선 정치 탄압에 직면한 기술 기업의 ‘전례없는 자기 구제’라는 평가가 나왔다.
화웨이는 17일 성명을 내 아너 부문을 선전시 즈신신정보기술에 매각한다고 밝혔다. 화웨이는 미 정부 제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아너 브랜드를 유지하고 공급상과 판매상이 계속 사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아너를 인수하는 즈신신정보기술은 30여곳의 아너 판매상 주도로 설립된 신설 회사다. 판매상들이 컨소시엄 구성을 주도했다는 게 화웨이 설명이지만 여기엔 선전시가 관할하는 국영 기업인 스마트도시과학기술발전그룹도 포함됐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매각 금액은 1000억위안(약 17조원) 안팎이다. 이번 매각 결정으로 아너 브랜드와 8000여명의 인력, 연구개발(R&D) 역량 등은 모두 즈신신정보기술로 넘어간다.
아너는 화웨이가 2013년 내놓은 브랜드다. 화웨이는 고가 스마트폰인 P시리즈와 메이트 시리즈는 화웨이 브랜드를, 보급형 중저가 제품은 아너 브랜드를 달아 별도 채널로 판매해왔다. 시장조사업체 카날리스는 올해 3분기 화웨이가 5170만대의 스마트폰을 출하했는데 이중 아너 스마트폰이 26%를 차지했다고 집계했다.
또 다른 시장정보업체 카운터포인트의 닐 샤 애널리스트는 중국 글로벌타임스에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아너 부문을 살리기 위한 매우 논리적인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글로벌타임스는 “이번 매각 결정으로 아너사는 구글 등 미국 기업 기술과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아너의 투명한 소유권이 미 정부의 의구심을 해소해 제재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 정부는 2018년부터 화웨이 때리기를 본격화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018년 8월 미 정부기관이 화웨이 기술과 제품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한 국방수권법에 서명했다. 미 정부는 그해 12월 화웨이 창업자의 딸인 멍완저우 부회장 겸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캐나다에서 스파이 혐의로 체포했다. 지난해 5월에는 화웨이를 수출통제기업 리스트에 올려 미국 기업이 화웨이와 거래할 때 정부 허락을 받도록 했다. 이에 더해 한국, 일본, 유럽 각국 정부에도 화웨이 퇴출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
결정타는 지난 9월 시작된 반도체 제재였다. 미 상무부는 외국 기업이 미국산 장비를 활용해 생산한 반도체를 화웨이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틀어막았다. 화웨이는 비축 부품으로 버텼지만 제재가 언제 풀릴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은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급성장한 화웨이가 세계 곳곳에 통신 인프라를 구축해 각국 정보를 중국 정부에 넘길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다. 5세대(G) 네트워크 기술에서 앞서 있는 화웨이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다는 평가다.
카운터포인트에 따르면 지난 3분기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삼성전자가 22%, 화웨이가 14%로 각각 1, 2위를 기록했다. 화웨이의 전체 스마트폰 출하량 중 아너 제품 비중은 4분의 1로 작지 않다. 아너를 매각하고 나면 화웨이와 삼성전자와의 격차는 더 벌어질 전망이다. 동시에 화웨이, 샤오미, 애플, 오포, 비보 등이 2위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구도가 형성될 가능성이 커졌다.
베이징=권지혜 특파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