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에게 프로 야구의 ‘사인 훔치기’는 좀처럼 용인되기 어렵다. 경기에서 이긴 팀의 팬에게나 진 팀의 팬에게나 부정한 방법으로 승패가 나뉜다는 것은 왠지 찝찝하다. 프로 스포츠를 보면서 느끼고 싶은 ‘스포츠정신’은 단연 아니다. 승부의 결과에 ‘돈’이 오가지만, 팬들은 승부로 향하는 과정에서 팀에 매료된다.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팬’을 ‘구단’으로 바꾸면 이 말이 적용되지는 않는 듯하다. 미국 메이저리그(MLB)에서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사인 훔치기’ 스캔들의 정점에 섰던 주인공들이 MLB 구단 감독직으로 속속들이 복귀하고 있다. 전 휴스턴 사령탑, A.J. 힌치 감독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신임 감독으로 취임한 데 이어 당시 벤치 코치 알렉스 코라(45)가 돌아왔다.
휴스턴은 월드시리즈를 우승했던 지난 2017년 홈경기를 치를 때 외야석에서 카메라로 상대 팀 포수의 사인을 찍게 했다. 동시에 이 영상을 더그아웃과 클럽하우스로 이어지는 통로에 설치된 TV를 통해 사인을 알렸다. 벤치 코치를 담당했던 코라는 TV에 나온 사인을 분석해 타석에 들어선 타자에게 파악한 사인 정보를 전달했다. 변화구 타이밍에 쓰레기통을 크게 두들겨 타자에게 변화구가 나오리라는 것을 알리는 식이었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지난 7일(한국시간) 2017년 휴스턴 사인 훔치기 스캔들의 주인공 코라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보스턴 구단은 “코라 감독과 계약했다. 코라 감독은 2022년까지 팀을 이끌고, 2023년과 2024년은 구단이 계약 연장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코라 감독은 과거에 벌였던 일을 깊이 반성하고 있다. 우리가 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면 코라는 잘 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고 코라 감독 영입 이유를 설명했다.
이러한 모습은 구단에서 프로 야구 생태계를 해치는 ‘사인 훔치기’를 가볍게 보고 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공교롭게도 보스턴도 사인 훔치기의 전력이 있다. MLB 사무국은 지난 2017년 9월 15일 “뉴욕 양키스가 ‘보스턴이 상대 포수의 사인을 훔쳤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사무국은 면밀히 조사해 보스턴이 규정을 위반한 사실을 밝혀냈다”며 “보스턴에 벌금을 부과했다. 추후 비슷한 일이 발생하면 더 큰 징계를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징계의 내용이 좀 이상했다. 당시 MLB 사무국은 “상대 포수의 사인을 훔치는 행위를 제재할 규정은 없다”고 말했다. 보스턴의 징계 사유는 사인을 훔친 것이 아니라 전달 방법이었다. ‘애플워치’를 훔친 사인을 타자에게 전달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했다. 다만 벌금이 어느 정도인지 공개하지는 않았다.
MLB 사무국이 ‘사인 훔치기’에 안일한 대처는 휴스턴의 사건이 수면으로 올라온 2020년에도 드러났다. 내부고발로 휴스턴의 ‘사인 훔치기’가 밝혀지자 5명의 팬이 사기·소비자보호법 위반·과실·부당이득 혐의로 소송을 제기했다.
스포츠 베팅에 참여한 손해를 배상하라는 주장이 함께 섞여 무게감은 덜했지만 황당한 건 MLB 사무국의 주장이었다. MLB 사무국은 소송을 기각시키기 위해 “부정행위도 스포츠의 일부고, 팬들도 이를 알고 있다”라는 내용이 담긴 문서를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연방지방법원에 제출했다.
다시 돌아온 코라 감독은 뒤늦은 내부 폭로로 2020년이 되어서야 MLB 사무국으로부터 1년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팬들은 여전히 분노했다. 지난 2017년 휴스턴의 월드시리즈 승리와 LA다저스의 패배가 정당했다고 아무도 여기지 않았다. 휴스턴 선수들에게는 야유가 쏟아졌다.
그리고 징계가 끝나자마자 징계로 쫓겨난 보스턴 감독직으로 복귀했다. 그의 복귀를 반길 리 없다는 것을 알기에 코라는 11일 본인의 감독 취임 기자회견에서 “보스턴 구단에 감사하다”면서도 “내 복귀 모습을 대단한 컴백 스토리로 다루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보스턴은 지난 2018년 보스턴을 MLB 정상으로 올려놨던 코라 감독이 없어지자 이번 시즌 바닥을 쳤다는 이유로 그를 다시 영입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구단이 ‘과정’보다는 ‘결과’에 주목하고, MLB 사무국은 프랜차이즈를 위해 용인하고 있는 모양새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