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내년 1월 출범하면 북·미 비핵화 협상은 당분간 안갯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바이든 행정부는 북·미 비핵화 협상과 관련해 원칙을 토대로 보텀업(bottom-up) 협상을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북·미 정상회담 같은 극적인 ‘쇼’와 톱다운(top-down)을 선호한 트럼프 행정부와는 협상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뜻이다.
앞으로 북·미 비핵화 협상은 내년 상반기 탐색전을 거친 후, 하반기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 핵능력이 고도화된 만큼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보다는 과거 클린턴 행정부의 ‘페리 프로세스’ 같은 적극적 해결 방안이 나올 수도 있다.
북·미 비핵화 협상, 대전환 예고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보여주기식 쇼에 가까운 북·미 정상회담은 보기 어려울 전망이다. 바이든 당선인은 토론회에서 북한 비핵화에 대한 실질적인 성과를 북·미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거듭 강조했다. 실무 차원에서 비핵화 프로세스 전반에 관한 구체적 합의나, 핵 동결 등의 실질적 비핵화 조치가 없으면 직접 움직이지는 않겠다는 의미다.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차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회담했지만 두루뭉술한 6·12 싱가포르 합의 외에는 실질적인 비핵화에선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비핵화 협상 방식을 지속 비판해온 바이든 당선인은 실무 협상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관측된다. 민정훈 국립외교원 교수는 10일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다시 한번 드러내고, 핵 동결 정도로 신뢰를 쌓아야 바이든 행정부가 북·미 정상회담에 나설 것”이라며 “바이든 당선인도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 간 만남 자체는 괜찮은 시도로는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앞으로 펼쳐질 북·미 비핵화 협상은 디테일 싸움으로 흐를 전망이다. 미국은 명확한 비핵화 최종상태(엔드 스테이트)와 비핵화 시작점인 핵 동결을, 북한은 유엔 대북 제재의 완화를 각각 요구하면서 치열한 협상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정부는 비핵화 프로세스에서 북·미가 각자 양보할 수 있고, 원하는 사항들의 리스트를 가지고 양측을 조율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결국 협상은 북·미를 중심축으로 남·북·미가 상호작용하는 식으로 간다는 의미다. 과거 북핵 6자회담과 같은 다자 포맷으로 회귀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북·미, 한·미, 남북 양자 간 3채널이 함께 돌아갈 수밖에 없다”며 “미·중 경쟁구도 속에서는 과거 6자회담이 다시 성립되긴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셈법 복잡한 북한, 당분간 탐색전
파트너가 바뀐 북한도 셈법이 복잡한 상황이다. 북한은 새롭게 들어설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 메시지를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탐색전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바이든 행정부는 분열된 미국 국내 통합 문제와 중국과의 관계,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 문제 등 현안이 산적해 있어 북한 문제는 후순위로 밀린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워싱턴 조야에서는 북한이 도발을 통해 바이든 행정부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하지만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등 고강도 도발을 감행하기엔 부담이 커 신중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ICBM 등 고강도 도발에 바이든 행정부가 초장부터 강경한 대북 정책으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 3월 예정된 한·미연합훈련이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한·미연합훈련 실시에 적극적이라면, 이걸 명분 삼아 북한이 도발에 나설 수 있어서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는 “북한이 미국을 직접 겨냥하기가 부담스러우면, 남한을 상대로 도발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제2의 페리 프로세스 주목
오바마 행정부 때인 2012년 북·미는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우라늄 농축 중단을 골자로 하는 2·29 합의를 채택했으나 직후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발사로 파기됐다. 이후 미국은 북한을 사실상 방치했다. 8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고도화된 북한의 핵능력은 바이든 행정부가 과거의 ‘전략적 인내’보다는 적극적 움직임을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외교부 북미국장과 청와대 외교비서관을 지낸 장호진 전 국무총리 외교보좌관은 “오바마 행정부는 효과적으로 북한을 압박할 수단을 찾지 못해 인내만 하다가 끝났다”며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 때의 이벤트성 접근보다는 북한에 대한 실효적인 압박과 설득 방안을 강구하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문재인정부가 종전선언이나 대북 제재 완화를 먼저하자고 주장하면 한·미 간 공조는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빌 클린턴 행정부 때의 ‘페리 프로세스’에 주목하고 있다. 1999년 5월 북한을 방문한 윌리엄 페리 미 대북정책조정관은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북한 체제를 보장한다는 포괄적·단계적 대북 접근 방식을 담은 ‘페리 프로세스’를 내놓았다. 1단계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중지와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해제, 2단계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중단, 3단계로 북·미, 북·일 관계정상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이 주요 내용이다.
이후 2000년 10월 채택된 ‘북·미 공동코뮤니케’는 미국의 대북 체제 보장 및 경제지원,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방문 준비를 위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까지 합의했다. 민 교수는 “‘페리 프로세스’와 유사한 방안을 만들어 적용한다면 바이든 당선인이 클린턴 전 대통령이 못 갔던 평양을 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
[한반도 기회와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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