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치러진 미국의 46대 대통령 선거는 한마디로 ‘바이블 벨트가 러스트 벨트에 무너진 사건’으로 규정짓고 싶다. 바이블 벨트는 전통적으로 보수 복음주의자들이 많이 사는 미국 남부 지역, 러스트 벨트는 녹슬고 낙후된 북부의 공업지대. 이번 선거는 북부와 남부 두 지역의 남북전쟁 재현 같은 벨트 싸움(우리는 ‘기 싸움’이란 단어를 유난히 좋아하지만)에서 녹슨 러스트 벨트가 바이블 벨트를 이긴 것.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선거전의 두 대표선수의 싸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바이블 벨트 지역의 전통과 정서만 일단 갖고 있으면 거룩해 보이고,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인가. 바이블 벨트를 폼으로 허리에 두르고 있는 것과 곧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삼성(성공, 성과, 성취)의 과시가 중요했지, 사람됨의 바름과 옳음은 무시됐다. 오랜 동안 바이블 벨트의 네온사인이 기독교의 어둠을 잘 가려주고 있었다. 화려한 바이블 벨트에 십자가를 그려놓고, 기독교, 정통 보수, 복음주의, 교회, 하나님 등의 단어를 자주 발음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내 자신을 비쳐보며 오랜 동안 생각해 보고 지켜봐야 한다.
둘째 트럼프는 바이블 벨트의 상징이었고 마지막 리얼리티 쇼 연출자였다. 트럼프가 기독교적 가치 몇몇을 보호하고, 백악관에서 목사님들 모셔놓고 ‘기도한다면’ 통했다. 그가 어떻게 자랐고, 그의 사생활이 어땠는지는 천하가 다 알면서도 바이블, 정통 보수 기독교만 내세우면 덮어졌다. 어떤 것이 죄이고, 악인지 분간이 안되는 시대를 만들었다. 그가 4년 동안 한 헤아릴 수 없는 거짓말, 인신공격, 모욕, 무시는 ‘소시오패스(Sociopath)’나 다름 없었고, 그 행동의 핵심은 잔인함이었다. 모든 것은 거래였고 거래 성공을 위해 어릴 적부터 무럭무럭 자란 분노가 그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게 그의 친조카이자 심리학자인 메리 트럼프가 쓴 ‘너무 과한데 만족할 줄 모르는’ 책의 핵심이다.
그런 그가 러스트 벨트 출신의 ‘치매 검사가 필요하다’던 말더듬이 ‘졸린 조, Sleepy Joe’에게 무너졌다. 말 잘 하고, 뭔가 있어 보이고, 박력 있고, 거칠 것이 없어 보였지만 그가 보인 괴물 같은 모습은 그가 평생을 피해 다녔던 유약함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다 좋아 그렇지 여보.” “다 좋아, 다 잘 될 거야”라는 “해로운 긍정성, toxic positivity”를 업고 침투한 코로나는 미국민 23만명을 이미 땅에 묻었다. 연일 세계 최고의 기록을 깨고 있음에도 “다 잘 될 것이야. 그렇지 여보” “곧 연기 같이 사라질 것이야.”
셋째 바이블 벨트와 트럼프의 합작 영화 제작자들은 러스트 벨트의 녹슨 도시, 녹슨 교회, 녹슨 가정, 녹슨 노동자들의 아픔을 헤아리는 척만 했지 실제는 그렇지 못했다. 수없이 죽어나가도 자기 골프장에서 골프를 휘두르는 멋진 샷은 녹슨 사람들의 실직과 빵 한 조각을 외면했다. 마이클 호튼이 경고한 대로 ‘미국제 기독교’에 속으면 안 된다. 번영, 긍정, 축복 상표를 붙인 제품 판매에만 신경을 썼지, 녹슬어 버린 우울한 도시민들의 절망과 눈물에는 ‘루저’란 비아냥만 트위터가 날아갔다. ‘저들만의 천국’에 나머지 ‘루저’들은 입장 금지.
이 3가지만 보면서 한국 기독교의 오늘은 어떤가.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번쩍거린다고 다 금이 아니고, 녹슬었다고 다 폐기물은 아니다. 녹슨 노인 바이든은 녹슨 지역인 펜실바니아 스크랜톤의 자기가 태어난 집을 방문해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서 백악관까지”라고 벽에 썼다. 그러나 트럼프는 “예수 다음으로 자기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했다. 코로나 한창 때 백악관 앞에 있는 교회로 별을 단 장군들과 수하들을 이끌고 가서 그 교회 앞에서 바이블을 손에 들고 기념사진을 찍은 트럼프식 기독교를 부러워하고 흉내내고 싶은 우리들의 기독교는 정상인가. 이제 녹슨 땅에서, 녹슨 옷을 입고, 녹슨 교회와 녹슨 나라를 일으키는 참 일꾼들이 나올 것이다.
사무엘상 5:1~4에는 무서운 이야기가 나온다.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다곤 신을 모시는 신당 안으로 가져가 다곤의 곁에 두었다. 그 다음날 그 다곤 상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을 목적 성취의 대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이 지금 시대에도 너무 많다. 다곤 신상 옆에 ‘신상’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궤를 세워놓은 블레셋 사람과 우리는 정말 얼마나 어떻게 다른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7).
최상준 한세대 기독학술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