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벼랑 끝에 내몰린 듯한 기분을 느끼기 마련이다. 원치 않던 불행으로 지치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때. 한 걸음 만 물러나도 끝 모를 낭떠러지로 추락할 것 같을 때. 좌절한 인간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12일 개봉하는 영화 ‘내가 죽던 날’에 이 오래된 숙제를 풀 실마리가 담겨 있다.
배우 김혜수도 그래서 이 작품을 선택했다. 5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혜수는 “영화를 선택했던 시기에 좌절감과 상처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극의 상황과 내 상황이 다른데도 내 이야기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타이틀을 보자마자 운명처럼 이끌렸고 연기를 하면서 많은 위안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30년 넘게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든 베테랑 김혜수가 어떤 작품보다도 많은 위로를 얻었다는 ‘내가 죽던 날’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삶의 벼랑 끝에 선 형사 현수(김혜수)가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외딴섬에서 사라져버린 고등학생 세진(노정의)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이 작품 주요 얼개다.
현수는 극에서 믿던 남편의 외도와 팔 마비로 인생이 뿌리째 흔들리는 인물이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세진이 실종되기까지의 행적을 밟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김혜수는 “등장인물 저마다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던 이에게 배신당하거나 자신의 삶을 부정해야 하는 처참한 상황”이라며 “현수는 결국 나이면서 우리 모두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앞서 시사회에서 공개된 영화는 미스터리 외피를 쓴 일종의 휴먼 드라마로 보였다. 사건보다는 현수가 수사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 이야기에 집중하고 그들의 과거와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건은 하나의 종착점을 향해간다. 절망하는 인간이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힘은 손을 내밀어주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다. 담담하면서도 탄탄한 연출과 영화가 가진 묵직한 메시지에 호평도 이어졌다.
김혜수는 “‘네가 너를 구해야지’ ‘인생 생각보다 길다’ 같은 대사가 결국 우리 영화의 메시지인 것 같다”면서 “내가 겪어온 절망이나 고통도 극복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은 없었다. 그저 주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흘려보냈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이런 경험은 영화 속 현수에게도 절절하게 묻어나 설득력을 배가시킨다.
김혜수는 함께 작업한 박지완 감독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좋은 글 덕분에 좋은 배우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진이 섬에서 살던 집의 주인이자 극의 핵심 주제를 관통하는 순천댁 역의 이정은이 그런 배우 중 하나였다. 김혜수는 “정은씨는 참 따뜻한 사람이다. 같이 연기를 하는 것도 좋았지만, 기본적으로 마음으로 사람을 품는 매력에 반했다”며 “삶의 궤적이 그 사람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고 했다.
이번 영화로 고통을 견디는 법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됐다는 김혜수는 최선에 한계를 두지 않는 배우가 꿈이라고 했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배우를 하게 돼 오랜 시간 몸담고 있지만, 이번처럼 좋은 작품과 사람들을 만나면서 감사하다고 생각한 순간도 많았다”며 “늘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충실한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많은 분이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인 것 같아요. ‘내가 죽던 날’을 보시고 제가 느꼈던 토닥여주는 듯한 따뜻한 위로를 느끼셨으면 해요. 누군가에게 이 영화가 작은 용기와 희망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